익재 이제현의 생애 – 3
■ 익재 이제현의 생애 – 3
익재 이제현에 대한 기존에 알려진 여러 가지 자료를 수집하였습니다.
이 중 몇 편의 글을 정리하여 올립니다.
◈ 사후
그의 학문은 이색(李穡)으로 이어졌다.
정몽주, 정도전, 권근, 이숭인 등 고려 말의 대표적 성리학자들은 대부분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배출된 인물들이다.
죽은 뒤에 경상북도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 되었고,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문충(文忠)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가 쓴 책들 중 현전하는 것으로는 익재난고 10권과 역옹패설 4권, 습유 1권이 전한다.
1504년(연산군 10년) 후손 이사균에 의해 충청북도 청원군 수락영당(水洛影堂)이 세워져 제향되었다.
1546년(명종 2년) 영암군 영암읍 망호리에 후손 이반기에 의해 영호사(靈湖祠)가 건립되었으며, 그 뒤 전라남도 장성군의 가산서원(佳山書院)과 전라남도 강진군의 구곡사(龜谷寺) 등에도 배향되었다.
◈ 사상과 이념
△ 작품성과 도덕적 교훈
문학에 있어서는 '道와 文을 본말(本末)의 관계로 파악하여 이들을 같은 선상에 두면서도 道의 전달에 상대적인 비중을 두는 문학관을 지니고 있었다.'는 시각이 있다.
산문의 작품성은 전 시대의 형식 위주의 문학을 배격하고 내용을 위주로 한 재도적(載道的)인 문학을 추구했다.
저서인 《익재난고》의 〈소악부小樂府〉에는 고려 민중들 사이에 돌던 민간 가요를 7언 절구로 번역한 17수가 특별히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오늘날 고려가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 역사서 편찬
유교 성리학적 지식 외에 그는 당시 국내의 역사 지식도 풍부하였다.
빼어난 유학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역사서 편찬과 감수, 증보 등을 주관하기도 했다.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 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 · 충선왕 · 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만년에는 《국사 國史》를 편찬하려 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기도 하였다.
△ 성리학 발전에 기여
그는 성리학을 소개, 보급하는데 노력하였다.
학자로서의 이제현은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발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는 점이 주목을 요한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의 제자였고 《사서집주 四書集註》를 간행하여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의 문생이요 사위였으며, 그의 제자가 이곡(李穀)과 이색의 부자와 정몽주, 정도전으로 그의 학통(學統)이 이어진다.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최초로 들여온 백이정에게 배우고 권보에게 학문을 익혀 이곡과 이색 부자를 길러낸 대학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성리학의 발전에 기여하면서 단순히 성리학에만 깊이 빠지지 않는 냉철함을 유지했고, 정치적으로는 원나라의 부마국이라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꾸준히 고려의 자주성 회복을 위해 최선을 다했던 현실적이면서도 지조 있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또한, 그가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 학자가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중국의 성리학에 직접 접하면서 그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충목왕 때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리학만이 진리라고 판단하지는 않았다.
성리학에만 경도되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뒷날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 온건 개혁론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의 광정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는 고려의 자주국론을 주장하는 세력의 견해도 일단 수용하였으나, 원나라의 속국으로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엄연한 현실로 인식하였다.
그는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였다.
△ 평가 기타
이색이 그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 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다.
그는 탁월한 유학자로 성리학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시는 형식과 내용이 조화를 이루면서도 수기치인(修己治人)과 관계되는 충효사상·관풍기속(觀風記俗)·현실고발의 내용과 주제도 담고 있는데 영사시(詠史詩)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가 특징을 이룬다는 평가가 있다.
사(詞)의 장르에서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시키면서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를 통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시각도 있다.
문학부문에서 그는 대가를 이루었다는 평가도 있다.
당시 복잡한 정치상황 아래에서 원과 고려를 넘나들면서 활약하여 최고의 지위에 오르지만, 화를 당하거나 유배된 적이 없었다.
후대에 편찬된 고려사에는 그의 국사에 실린 사론이 종종 인용되었다.
그의 사후 이색이 그의 묘갈명을 쓰기 위해, 그의 집안에서 사람을 시켜서 경주이씨 족보를 싣고 오던 도중 유실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비교적 근래의 선조인 신라 소판 이거명부터 세대를 계산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