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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 이제현의 생애 - 1

녹전 이이록 2018. 7. 16. 10:04

익재 이제현의 생애 - 1



익재 이제현에 대한 자료를 수집 중 여러 종류의 글을 모았습니다.


이 중 몇 편의 글을 뽑아 올립니다.


이제현(李齊賢, 1288128(음력 12871224) ~ 1367824(음력 729))은 고려 후기의 시인· 문신· 성리학자· 역사학자· 화가이다.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 역옹(櫟翁), 실재(實齋)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본관은 경주(慶州). 검교정승(檢校政丞) 이진(李瑱)의 아들이다.


경주 이씨(慶州李氏) 14개 대파 중 익재공파(益齋公派)의 파조(派祖)이다.


백이정의 문인으로 과거에 급제한 후 연경궁녹사, 예문춘추관, 사헌부규정을 거쳐 1319년 충선왕의 초빙으로 원나라로 건너가 만권당에서 연구하였으며, 충선왕이 모함을 받고 유배되자 그 부당함을 원나라에 간하여 1323년 석방되게 했다.


1320년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에 책록 되었고, 그 뒤 밀직사, 정당문학, 삼사사 등을 거쳐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작되었고, 1357년 문하시중에 올랐으나 기철 등 친원파 암살 사건을 중재하려다가 실패하였다.


이후 사직하고 은퇴,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 저술에 몰두하였다.


고려 말의 유학자이자 성리학자이며, 공민왕의 후궁 혜비 이씨의 친정아버지였다.


고려말 신진사대부와 조선의 사림파의 학문적 선조로서, 성리학을 들여와 발전시켰으며, 그의 문하생 목은 이색은 후일 정도전, 조준, 남은, 정몽주, 길재로 학파가 나뉘게 된다.


그림과 서예에도 능하여 그림과 서예작도 남겼고, 평론서인 역옹패설 등과 많은 산문, 시문 등을 남겼다. 백이정, 권부의 문인이다.


출생과 가계


지은이 성명이 알려지지 않은 글로 원문 그대로 올리되 잘못된 내용에는 [*................]로 바르게 수정하였습니다.

 

익재 이제현은 1287년 검교정승인 임해군 이진(李瑱)과 부인 진한국대부인 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건국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이며 경순왕의 사위인 이금서(李金書)[형부상서 좌사간] 이주좌의 후손이었지만 [*5대조 이선용의 대에 말단직인 군윤이 된 이래 하급관료를 전전하다가 *아버지 이진이 다시 가문을 일으켰다. 6대조 중조 11세 생원 이현복. 5대조 이선용의 대에 군윤, 4대조 중조 13세 보윤공 이승고 이래로 하급관료를 전전하다가 중시조 14세 문림랑 상의원 직장 동정 득견과 중흥조 15세 열헌공 핵 이후 39손이 현달하여 모두 관직에 나갔다.]


아버지 이진(李瑱)은 과거에 급제하여 신흥관료로서 크게 출세함으로써 다시 가문을 일으켜 세웠으며,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그의 처음 이름은 지공(之公)이고, 자는 중사(仲思)인데 뒤에 제현으로 이름을 개명하였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일찍 조숙하여, 서를 즐겼고, 글을 잘 지었다.


어려서부터 글을 지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는 이미 작가로서의 작자기(作者氣)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일찍이 백이정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수학하였고, 뒤에는 후일 장인이 된 권부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과거 급제


1301(충렬왕 27) 나이 15세로 성균관시에 장원급제하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여 환로에 들었다.


이해에 당대의 대학자며 권세가였던 (안동 권씨) 권보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그러나 부인 권씨는 일찍 사별했고, 함양 박씨 박거실(朴居實)의 딸 박씨와 재혼했다가 나중에 서중린(徐仲麟)의 딸 (서원군부인) 서씨를 3취로 맞이하였다.


(또한 몇 명의 첩이 있었는데, 그 중 한명의 첩에게서 두 딸을 얻었다.) - 삭제  ⇒ (39녀를 둠)


1303년 권무봉선고 판관(權務奉先庫判官), 연경궁 녹사(延慶宮錄事)에 임명되고 1308년 예문 춘추관에 들어갔다.


1309년 사헌부 규정(司憲府糾正)이 되었다.


원나라 체류 시절


1314(충숙왕 1) 충숙왕 때 백이정의 문하에 들어가, 그로부터 정주학(程朱學)을 공부하였다.


그 해 원나라에 가 있던 상왕 충선왕이 만권당(萬卷堂)을 세우고 성균악정(成均樂正)에 이른 이제현을 부르자, 연경(燕京)에 건너갔다.


연경을 방문한 그는 충선왕이 세운 만권당에서 염복, 조맹부(趙孟頫), 요수, 원명선 등의 한인 출신 대학자들과 학문을 논할 기회를 갖게 된다.


원나라 체류 시 만권당에서 고전을 연구하며 원나라의 명사 요수(姚邃) · 염복(閻復) · 원명선 · 조맹부 등과 교우하며 학문이 더욱 심오해졌으며, 그때 진감여(陳鑑如)가 이제현의 초상화를 그리고 원나라의 석학 탕병룡(湯炳龍)이 찬()을 썼는데, 그 필적과 그림이 대한민국의 국보 제110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 자신에게 익숙한 원나라에 있으면서 새로이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기며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하였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 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하였던 것이다.


원나라에 체류 중일 때에도 그의 신분은 고려의 관리였다.


충선왕은 아들 충숙왕에게 이제현의 직책을 유지해줄 것을 알려왔고, 충선왕, 충숙왕의 특별 배려로 만권당에 에 체류하며 활동하는 동안에도 그는 때때로 고려에 와서 관리로 복무할 수 있었다.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 ·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 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하였다.


원나라 여행과 귀국


1316년 스스로 자청하여 충선왕을 대신하여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치제(致祭)하기 위하여 출발하여 대신 제사를 지내고, 3개월 동안 서촉을 왕래하였다.


그 뒤 귀국했다가 1319년 다시 출국하였다.


1319년 원나라에 가 1319년에는 충선왕과 함께 절강성의 보타사를 찾기도 했다.


그러나 1320년 충선왕이 모함을 받아 원나라 조정으로부터 벌을 받고 토번에 유배되자 귀국한다.


그러나 그는 충선왕의 방환운동을 적극 추진하여 유배지를 토번에서 타마사로 옮겨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에도 충선왕의 석방을 적극 청원하여 1323년 풀려나오게 하였으며, 그 후에도 충숙왕이 모함을 받아 두 차례나 원나라에 잡혀갔을 때에도 원나라 조정에 글을 올렸다.


1323년에는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기 위해 감숙성의 타마사를 방문해 또 한 번 중국의 외진 절경과 문화재를 둘러볼 기회를 갖게 된다.


이 같은 세 번에 걸친 중국에서의 여행은 그의 견문을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