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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 기록된 경주이씨 인물(이칭. 이녹천) - 7

녹전 이이록 2018. 6. 21. 09:45

고려사절요 등 문헌에 기록된 경주이씨 인물(이칭. 이녹천) - 7



이칭(李偁)


사록공(司錄公. 휘 칭. 보조공신. 증 문하시중)은 중시조 7세로 계대는 아래와 같습니다.


1세 - 2- - 3세 -4세 -5세 -6- - 7

소판공...병부령공..낭중공..병정공..시랑공..좌사간공..사록공

거명......금현.........금서......윤홍....승훈.....주복......

중시조..............분적종 아산이씨 분적조 주좌......우칭 분적종 재령이씨 분적조


경주이씨대종보(1987년도 간행)’에는 아래와 같이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7()


補祚功臣 門下侍中. 舊譜司錄이니 補祚功臣 이로써 贈職

- (보조공신 문하시중). (구보)()(사록)이니 (보조공신)은 이로써 (증직)이다.


按載寧李氏譜(안 재령이씨보)李禹偁(이우칭)左司諫(좌사간)周復之子也(주복지자야)門下侍中(문하시중)으로 封載寧君(봉 재령군)하고 爲始祖云(위시조 운)하니 ()兄弟(형제)이다.


- 재령이씨 족보를 살펴보면 이우칭은 좌사간 주복의 아들이라 문하시중으로 재령군에 봉해지고 시조 운운하니 중조 7司錄(사록) 이칭(李偁)의 형제이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26권 공민왕 1(恭愍王一) 정유 6(1357), 김종서 등(金宗瑞 等)


8월에 전우상(全祐祥)ㆍ신귀(辛貴)ㆍ조휘(趙暉)ㆍ조만통(趙萬通)ㆍ홍개도(洪開道)이칭(李稱)ㆍ정인(鄭珚)ㆍ강찬(康贊)ㆍ홍상재(洪尙載) 등에게 곤장을 때려 귀양 보냈는데, 이것은 이들이 채하중(蔡河中) 사건의 공술에서 그와 연루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녹천(李錄千) 의 계대


경주이씨 대종보이녹천의 계대입니다.

중시조 ---8– → 9- - - - - - - 10- - - - - - - 11

거명(소판)........치련......총섬(문하시중)......춘정(순흥부사) 현복(생원)

.......................舊譜(구보)不錄(불록)..춘림(문하시랑) 녹천(상서)


경주이씨 대종보의 이녹천 행적


[工部尙書. 仁宗乙未爲上將軍하야 以舟師攻西京賊妙淸餘黨하니 事見麗史하다.

- 공부상서. 인종 을미년에 상장군에 올라 통제사로 서경의 도적 묘청 잔당을 공격한 사실이 고려사에 보인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9


인종 공효대왕 1(仁宗恭孝大王一) 병오 4(1126) - 김종서 등(金宗瑞 等)


자겸이 또 준경과 함께 상의하여, 난이 일어나던 날에 숙직하던 사람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죽이자 하니, 이수(李壽)가 굳게 반대하여 그만두었다.


장군 이녹천(李祿千)ㆍ김단(金旦)ㆍ김언(金彦)은 도피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이날 궁궐이 다 타버리고 오직 산호(山呼)ㆍ상춘(賞春)ㆍ상화(賞花)의 세 정자와 내제석원(內帝釋院) 행랑 수십 칸만이 겨우 남았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10권 인종 공효대왕 2(仁宗恭孝大王二) 을묘 13(1135), 김종서 등(金宗瑞 等)


상장군 이녹천(李祿千), 대장군 김태수(金台壽), 녹사 정준(鄭俊)ㆍ윤유한(尹惟翰), 군후(軍候) 위통원(魏通元) 등을 보내어 서해(西海)의 해도로부터 병선 50척을 영솔하여 서경의 적들을 토벌하는 데 돕게 하였다.


녹천이 철도(鐵島)에 이르러 곧장 서경으로 향하려고 하였는데 때마침 날은 저물고 조수(潮水)도 물러갔다.


병선판관 정습명(鄭襲明)이 말하기를, “수로가 좁고 얕으니 조수를 타고 출발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녹천이 듣지 않고 가다가 중간에 이르러 물이 얕아 배가 바닥에 붙고 말았다.


서경의 적이 작은 배 10여 척에 섶[]을 싣고는 기름을 뿌리고 불을 질러 조수를 따라 놓아 보내고, 먼저 길가의 수풀 속에 궁노수(弓弩手) 수백 명을 매복시키고, 불이 일어나면 때를 같이하여 일제히 활을 쏘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불을 실은 배가 전함과 서로 맞닿자 전함은 연소되고 매복한 궁노수의 화살이 함께 날아오니, 녹천이 크게 낭패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병선과 병장기가 모두 불에 타고, 군사들은 거의 다 물에 익사하였으며 김태수와 정준도 모두 전사하였다.


녹천은 쌓인 시체를 밟고 언덕에 올라 겨우 자기 몸만 빠져 나왔다.


이로 말미암아 서경의 적들이 비로소 관군을 경시하게 되었다.


동문선(東文選) 29


비답(批答) 상장군 이녹천 청로 3표 의윤(上將軍李祿千請老三表依允)- 서거정 등(徐居正等)


최유청(崔惟淸)


장년(壯年)에 힘을 다하다가 늙어서 쉬는 것은 신하가 진퇴를 완전히 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또한 조정이 원로를 우대하는 덕인바, 시종(始終)을 온전히 하는 의리에 대해서는 규정이 갖추어져 있다.


경은 여러 해 동안 궁궐을 숙위하여 경호(警護)에 허다한 공적을 남겼는바, 이제 늙어 쉬려함은 당연한 것이다.


이에 짐의 어진 이를 탐하는 지극한 마음을 억제하여, 경의 그칠 줄 아는 고상한 뜻을 성취케 하노라.


동사강목(東史綱目)


8하 을묘년 인종 13(송 고종 소흥 5, 금 희종(熙宗) 천회 13, 1135-금 희종이 즉위하였으나 그대로 천회 연호를 사용했다-) 안정복(安鼎福)


상장군(上將軍) 이녹천(李祿千)이 주사(舟師- 수군통제사)로 서경(西京)을 공격하다가 패전하였다.


왕이 내시(內侍) 정습명(鄭襲明) 등을 보내어 서경의 남쪽 서해(西海)의 섬에 가서 수군(水軍) 46백여 명을 모아 전함 140척으로써 순화현(順化縣)지금의 순안(順安) 의 남강(南江)에 들어가서 적선을 막게 했는데, 이때에 와서 또 이녹천 등을 보내어 서해로부터 주사(舟師) 50척을 거느리고 토벌을 돕게 했다.


철도(鐵島- 지금의 황주黃州 서쪽 해중海中에 있다.)에 이르러 서경으로 바로 달려가려고 했는데, 때마침 해가 저물고 조수(潮水)가 물러가므로, 습명은 말하기를,


물길이 좁고 얕으니 조수를 이용하여 떠나야 합니다.” 하였으나, 녹천은 듣지 않고 수로를 반쯤 갔는데 물이 얕아 배가 움직이지 못하였다.


이에 적이 작은 배 10여 척에 섶을 싣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러서 조수를 따라 방화(放火)하고, 앞서 길가의 초목이 우거진 사이에 노수(弩手) 수백 명을 매복시켜 놓고는 불이 일어나면 동시에 일제히 일어나기로 약속하였다.


불이 붙은 배가 서로 가까이 다가와서 전함에 불길이 번져 붙고 많은 화살이 한꺼번에 날아오매, 녹천은 낭패하여 일을 도모할 바를 모르고, 무기는 모두 불타고 사졸들은 물에 빠져 거의 다 없어졌다.


대장군(大將軍) 김태수(金台壽)와 녹사(錄事) 정준(鄭俊)도 죽었으며, 녹천은 쌓인 시체를 밟고서 언덕에 올라와 겨우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서경 사람이 비로소 관군을 가볍게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