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 때 사용한 영정사진, 제사 때 사용은?
● 장례 때 사용한 영정사진, 제사 때 사용은?
【49제 후 장례 때 모셨던 영정사진을 모시고 집으로 왔습니다.
제사 때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집안 어르신이 말씀하시길, 장례 때 사용했던 영정사진은 묘소에서 태우고 제사에 사용하는 영정사진은 다른 사진으로 모시라고 하시는데 이 말씀이 맞는지요?】
아래와 같이 Y선생과 C선생 두 분 선생께서 답변을 올려 주셨습니다.
좋은 내용이기에 읽어 도움이 되는 글이기에 실명대신 익명으로 하여 올립니다.
△ Y
① 고례에는 영정사진이 없었으므로, 이에 대한 예법이나 문헌이 있을 리 없습니다.
현대는 혼백대용으로 영정사진을 쓰기도 합니다.
과거에는 영좌에 혼백을 모셨다가 발인 때 先魂帛(선 혼백), 後神主(후 신주. 木)이었다가 반곡(反哭 - 주상과 복인들이 신주와 혼백 또는 영정을 영거盈車에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을 말한다. 혼백을 다시 집으로 모시고 온다고 해 반혼返魂이라고도 한다.)에는 先神主(선 신주), 後魂帛(후 혼백)의 순으로 모시고 돌아왔습니다.
② 그러나 고례에도 혼백을 광중에 묻거나 우제(虞祭- 장사를 지낸 뒤 처음 지내는 제사인 초우初虞, 두 번째 지내는 제사인 재우再虞, 세 번째 지내는 제사인 삼우三虞를 모두 통틀어 이르는 말) 후에 묻는다는 등 설이 같지 않았습니다.
또 大祥(대상)까지 궤연(几筵- 혼백이나 신위를 모신 자리와 그에 딸린 물건들)에 모시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원용한다면 영정사진은 묻을 수는 있어도 태울 수는 없을 것입니다.
더욱이 어떻게 조상의 尊影(존영)을 불사를 수 있겠습니까?
[자손으로서 차마하지 못할 일입니다.]
③ 귀견의 ‘제사에 사용’은 무방하다는 소견입니다.
조상의 영정이므로 소중히 모시면서 제사에 사용하신다면, 사모하는 정과 후세의 교육에도 바람직 할 것이란 생각입니다.
[사진을 보존하시려면 (후일을 위하여) 뒷면에 諱字(휘자)를 기록해 두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 참고로 본 소견은 중국이 아닌 우리나라의 家禮輯覽(가레집람)과 성균관이 펴낸 ‘우리의 생활예절’을 근거로 삼았습니다.
△ C
아래와 같이 살펴보건대 문묘에서는 화상을 모시고 춘추로 후학이 모여 석채(釋菜)의 제를 지내나 사서인(士庶人)은 그러한 제도나 예법이 없습니다.
온공 설을 따른다 하여도 속례로 화상(지금의 사진)은 혼백 뒤에 둔다 하였으니 혼신은 혼백에 의지할 뿐이고 사진은 단지 망자가 생시 누구임을 알려주는 역할을 할 따름이라 생각됩니다.
현재 속례로 장례 행렬 선두에 망자의 사진은 앞세우는데 맨 앞에는 영거(혼백) 다음에 사진이 따라야 옳은 것입니다.
따라서 우제나 기제사 등의 신좌에 사진을 세워 놓고 제사함은 유가적 견해로는 예법에 어그러집니다.
다만 옛적에도 속례로 행한바 있으니 혹 사진은 신주(지방) 뒤에 같이 모시고 제사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작금에 혹 사진을 신주(지방) 대용으로 신좌에 모시고 제사하고 있다면 이는 유가의 법도에 맞지 않는 속례일 뿐입니다.]
소견)
위 답변을 보면 영정사진을 제사때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정확한 답변이 없습니다,
[문묘에서는 화상을 모시고 춘추로 후학이 모여 석채(釋菜)의 제를 지내나 사서인(士庶人)은 그러한 제도나 예법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문묘에서는 화상을 모시고 춘추로 석채(釋菜)의 제를 지냈는데 왜 일반인은 영정사진을 모시고 제사를 모시면 안되는가?
또 [사진을 세워 놓고 제사함은 유가적 견해로는 예법에 어그러집니다.]라고 피력해 놓고는 아래와 같이 답하고 있습니다.
[속례로 행한바 있으니 혹 사진은 신주(지방) 뒤에 같이 모시고 제사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는 사진을 세워 놓고 제사함은 유가적 견해로는 예법에 어그러진다고 하고선 '영정사진을 신주뒤에 모시고 제사를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선 또 [작금에 혹 사진을 신주(지방) 대용으로 신좌에 모시고 제사하고 있다면 이는 유가의 법도에 맞지 않는 속례일 뿐입니다.]라고 영정사진을 모시고 제사를 모셔도 되는지 모시면 안되는지가 모호합니다.
유명 선생의 말씀이라 오락가락하여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 Y
① 俗禮(속례)도 예입니다.
대체로 그 시대의 유행하던 예절을 속례라 이릅니다.
주자도 가례를 지으면서 뺄 것은 빼고, 더할 것은 더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사계선생도 ‘중국의 예법이 우리와 맞지 않는다며 당시의 속례를 채용’하였습니다.
[현대의 時俗(시속)들이 이어지면, 자연스레 우리의 예절로 정착될 것입니다.]
② 혼백과 신주의 主從(주종. 先後선후)은 이미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만약 지방과 사진을 함께 모시고 제사할 경우 ‘지방(신주대용이므로)이 主(주)이고, 사진은 從(종)’입니다.
그러므로 ‘西紙榜(서 지방), 東寫眞(동 사진)’으로 모셔야 할 것입니다.
[竝設(병설)일 경우는 주종의 위치가 다른 견해(중앙상석)도 있습니다.]
③ 禮(예)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可變(가변)의 것인데도 고례만을 고집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옛날에도 “禮不泥古(예불니고) 因時制宜(인시제의)”라 하였습니다.
고례에만 얽매이지 말고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禮學(예학)의 宗匠(종정) 沙溪(사계)선생도 “한낱 옛 법에 집착할 줄만 알고서 오늘의 시의적절함을 헤아리지 못한다.(近思錄釋疑; 徒知滯泥於古法 而不度今時之所宜)”고 우려한 바 있습니다.
④ 사계선생이 아니더라도 먼 옛날에 있었던 나라도 다르고 풍습도 달랐던 중국의 孔子(공자), 朱子(주자)를 맹종하는 것은 우리의 현실과 괴리가 있습니다.
공자도 “삼베로 짠 관을 쓰는 것이 禮(예)인데, 지금은 실로 만들었으니 검소하다. 나도 여러 사람이 하는 대로 따르겠다.(論語子罕 ; 子曰 麻冕禮也 今也純儉 吾從衆)”고 했습니다.
(2,500년 전 공자도) 실로 짠 면관은 예는 아니라면서도, 시속의 실용을 따랐습니다.
[위 글의 일부는 상례비요와 주자가례의 序文(서문)을 인용하였습니다.]
소견)
C 선생은 전거에 근거하여 [기제사 등의 신좌에 사진을 세워 놓고 제사함은 유가적 견해로는 예법에 어그러집니다. 다만 옛적에도 속례로 행한바 있으니 혹 사진은 신주(지방) 뒤에 같이 모시고 제사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작금에 혹 사진을 신주(지방) 대용으로 신좌에 모시고 제사하고 있다면 이는 유가의 법도에 맞지 않는 속례일 뿐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속례에는 행한바 있다고 하면서도 장례 때의 영정사진은 기제사 때에 사용하는 것은 유가의 법도에 맞지 않다. 라고 하였습니다.
반면 Y선생은 [禮(예)는 시대에 따라 변하는 可變(가변)의 것인데도 고례에만 얽매이지 말고 시대에 맞게 변해야 한다.]고 하며 장례 때에 사용한 영정사진을 ‘기제사에 사용’은 무방하다는 견해입니다.
지방과 신주가 신위를 뜻하는 만큼 영정사진도 고인의 모습인데 제사에 모신다고 해서 다를 바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