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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忠武)’ 시호를 받은 선조 – 3

녹전 이이록 2016. 7. 22. 10:10

충무(忠武)’ 시호를 받은 선조 3



카페나 블로그, , T!P 등에 충무(忠武)’ 시호를 받은 선조님에 대하여 올린 글을 보면 아홉 분이 아니면 열두 분으로 올리고 있습니다.


이는 충무시호를 받은 조선시대 인물 아홉 분만 올린 경우와 고려시대 세 분과 조선시대 아홉 분 등 열두 분 모두를 올린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고려 시대 인물 - 지용수. 박병묵. 최필달


조선 시대 인물 - 조영무. 남이. 이 준. 이순신. 김시민. 이수일. 정충신. 구인후. 김응하


8, 김시민(1554~1592) () 안동 김씨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면오(勉吾). 목천(木川) 출신.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지평 김충갑(金忠甲)이다.

1578(선조 11) 무과에 급제해 군기시(軍器寺)에 입사하였다.

1581년 부평부사가 되었으나 구황(救荒: 자연 재해로 입은 피해를 구제함)에 전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되었다.

1583년 이탕개(尼湯介)의 난 때 도순찰사 정언신(鄭彦信)의 막하 장수로 출정해 공을 세웠다.

그 뒤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이 되었으나 군사에 관한 건의가 채택되지 않자 사직하였다.

1591년 진주판관이 되어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목사 이경(李璥)과 함께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목사가 병으로 죽자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에 따라 그 직을 대리하였다.

먼저 민심을 안정시키고 피난했던 성민을 귀향하게 하였다.

그리고 성을 지키기 위해 성을 수축하고 무기와 기재를 정비하는 한편, 군사의 항오(行伍)를 편성, 군사 체제를 갖추었다.

이 때 왜적은 진주의 방위가 허술함을 알고 창원· 진해· 고성으로부터 사천에 집결한 다음 진주로 향하려 하였다.

이에 곤양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 의병장 이달(李達곽재우(郭再祐) 등과 합세해 적을 격파하고, 도망하는 적을 추격해 십수교(十水橋)에서 다시 승리를 거두어 고성·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였다.

이어서 의병장 김면(金沔)의 원병 요청을 받고 정병 1,000여 명을 이끌고 호응, 거창의 사랑암(沙郎巖)에서 김산으로부터 서남진하는 왜적을 맞아 크게 무찔렀으며, 여러 차례의 전공으로 그 해 8월 진주목사로 승진되었다.

취임하자 곧 적군의 제조 방식을 모방해 염초(焰硝) 500여 근과 총통(銃筒) 70여 병()을 만들고 정병을 뽑아 사용법을 연마하게 하는 등 성을 지키는 방책을 강화하였다.

9월에는 진해로 출동해 적을 물리치고 적장 평소태(平小太)를 사로잡아 행재소(行在所)로 보내자 조정에서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하였다.

당시 왜적은 진주가 전라도로 통하는 경상우도의 대읍(大邑)이며, 경상우도의 주력이 그곳에 있음을 알고 대군으로 공격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105일 적은 진주의 동쪽 마현(馬峴)에 출현했고, 6일에는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성안에 명령을 내려 노약자와 부녀자까지 남장을 시켜 군사의 위용을 보이게 하는 한편, 화살을 함부로 쏘아 허비하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키는 등 적과의 싸움에 대처해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적의 2만여 대군이 성을 포위하자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7일간의 공방전을 벌여 적을 물리쳤으나 이 싸움에서 이마에 탄환을 맞았다.

병상에 누워 있으면서도 국사를 근심하고 때때로 북향해 절하고 눈물을 짓다가 상처가 깊어져 며칠 뒤에 죽었다.

죽은 뒤 성에서는 적이 알까봐 비밀로 했다가 안정이 된 뒤 상을 치렀는데, 상여가 함양에 이르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에 발탁되었다는 조정의 명을 받았다.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과 영의정에 각각 봉해졌고, 이와 함께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진주의 충민사(忠愍祠산성정충당(山城旌忠堂)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9, 이수일(1554. 명종9~ 1632. 인조10), 경주 이씨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계순(季純), 호는 은암(隱庵). 충주 출신. 주부(主簿) ()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자침(自琛)이고, 아버지는 증 영의정 난()이며, 어머니는 참봉 우담령(禹聃齡)의 딸이다.

아들은 우의정 완(- 효종 때 북벌. 어영대장. 포도대장 등 이완 대장으로 통함)이다.

1583(선조 16) 무과에 급제, 훈련원의 벼슬을 거쳐 1586년 소농보권관(小農堡權管)이 되었다가 남병사 신각(申恪)의 막하로 들어갔다.

1590년 선전관이 되고, 다음 해 장기현감으로 발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분전했으나 예천· 용궁에서 패전하였다.

다음 해 밀양부사로 승진, 이어 경상좌도수군절도사에 발탁되고 왜적을 격퇴한 공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그 뒤 회령부사에 이어 1597년 나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지역의 중요성을 감안한 도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의 요청으로 성주목사가 되었으나 명령을 어겨 장형(杖刑)을 받고 종군하였다.

1599년 북도방어사가 되었다가 곧 북도병마절도사로 자리를 옮겼다.

1602년 남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변방을 침범하는 야인들의 소굴을 소탕했으며, 다음 해 경상우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창원에 있는 병영을 진주로 옮기도록 하였다.

1606년 길주목사로 방어사를 겸하고, 다음 해 수원부사에 이어 다시 북도병마절도사가 되고, 1611(광해군 3) 지중추부사로 지훈련포도대장· 원유제조(園囿提調)를 겸하였다.

1612년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1614년 임기를 마치고 다시 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1616년 숭정대부에 올랐다.

1624(인조 2)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부원수를 겸해 길마재鞍峴에서 반란군을 무찔러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1628년 형조판서가 되고, 1631년 남한수어사(南漢守禦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0, 정충신(1576. 선조9) 1636. 인조14). 금성 정씨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고려 명장 지()9대 손으로, 아버지는 금천군(錦川君)()이다.

어머니는 영천 이씨(永川李氏)로 인조(仁祚)의 딸이다.

미천한 집에서 태어났으며 절도영(節度營)에 속한 정병(正兵)이었고, ()에 예속된 지인(知印 : 通引)을 겸하였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이때 권율이 장계를 행재소에 전달할 사람을 모집했으나 응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17세의 어린 그가 가기를 자청하고는 왜군으로 가득한 길을 단신으로 뚫고 행재소에 도착하였다.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이 그에게 사서(史書)를 가르쳤는데 머리가 총명하여 아들같이 사랑하였다.

이 해 가을에 행재소에서 실시하는 무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1621(광해군 13) 만포첨사로 국경을 수비했으며, 이 때 명을 받고 여진족 진에 들어가 여러 추장을 만나기도 하였다.

1623(인조 1) 안주목사로 방어사를 겸임하고, 다음해이괄(李适)의 난 때는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전부대장(前部大將)이 되어 이괄의 군사를 황주와 서울 안산(鞍山)에서 무찔러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이괄과 친분이 두터웠던 그는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에 문회(文晦) 등의 고발로 체포되었으나 은혜를 입고 풀려났다.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부원수를 지냈고, 1633년 조정에서 후금(後金 : )에 대한 세폐의 증가에 반대, 후금과의 단교를 위하여 사신을 보내게 되었는데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당진에 유배되었다.

이후 다시 장연으로 이배되었다가 곧 풀려 나와 이듬해 포도대장· 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636년 병이 심해지자 왕이 의관에게 명해 치료에 진력하게 했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왕이 내시로 하여금 호상하게 하고 어복(御服)을 주어 수의(禭衣)로 하게 했으며, 관청에서 의로써 장사를 치르게 하였다.

키가 작으면서도 씩씩했고 덕장이라는 칭송을 들었으며, 민간에 많은 전설을 남겼다.

천문· 지리· 복서· 의술 등 다방면에 걸쳐서 정통했으며, 청렴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광주(光州) 경렬사(景烈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만운집·금남집 錦南集·백사북천일록 白沙北遷日錄등이 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1, 구인후(.1578. 선조111658. 효종9). 능성 구씨
 

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중재(仲載), 호는 유포(柳浦). 증조는 능성군(綾城君) (), 할아버지는 좌찬성 사맹(思孟), 아버지는 대사성 성(), 어머니는 별좌 정억령(鄭億齡)의 딸이다.

뒤에 홍()에게 입양되었다.

인조의 외종형이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이다.

1603(선조 36) 무과에 급제해, 1606년 선전관이 되고, 고원군수·갑산부사 등을 지냈다.

광해군과 대북 세력의 정치에 반감을 지니고 있던 중 1620(광해군 12) 이서(李曙신경진(申景禛)의 반정 모의에 참여했다.

1621년 진도군수가 되었고, 1623(인조 1)의 반정에는 미처 서울에 도달하지 못해 참여하지 못했으나, 처음부터 계획을 세운 공로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능천군(綾川君)에 봉해졌다.

반정 뒤 통제사· 한성부윤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으로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했을 때는 주사대장(舟師大將)이 되었다.

전라병사·포도대장을 거쳐 충청병사·수원방어사 등을 역임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군사 3,000 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에 들어가 국왕을 호위했으며, 그 공으로 어영대장이 되었다.

전후로 도총부도총관· 비변사제조· 판의금부사 등을 겸임했으며, 1644년에는 심기원(沈器遠)의 모역 사건을 적발, 처리한 공으로 영국공신(寧國功臣) 1등에 책록되고 능천부원군(綾川府院君)에 봉해졌다.

인조 말년에는 수차례의 병조판서를 비롯해, 형조· 공조의 판서와 수원부사· 훈련대장 등을 두루 역임했다.

1652(효종 3) 판의금부사· 홍청도병마절도사(洪淸道兵馬節度使)가 되고,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654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으로서 처형당한 강씨(姜氏)의 신원을 요구하다 죄를 입은 김홍욱(金弘郁)을 옹호하다가 삭직 당했으나 곧 복관되고 좌의정에 올랐다.

공신인 동시에 인조의 외척으로서, 당시 공신들간의 대립이나 공신들과 일반 사류들 사이의 대립에 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별다른 기복 없이 정치적 위치를 지킬 수 있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12, 김응하(1580. 선조131619. 광해군11). 철원 김씨(안동 김씨)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희(景羲). 철원 출신. 고려의 명장 방경(方慶)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증 승지 지사(地四)이다.

1604(선조 37) 무과에 발탁되었으나 처음에는 별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평소부터 그의 무장적인 재능을 아끼던 박승종(朴承宗)이 병조판서가 되자 비로소 선전관에 제수되었으나, 이듬해 여러 사람의 질시를 받아 파직 당하였고, 1608(광해군 즉위년)박승종이 전라관찰사로 나가자 다시 기용되어 비장(裨將 : 지방사신을 따라다니던 관원)이 되었다.

1610년에 재차 선전관에 임명되었으며, 영의정 이항복에 의해 경원판관으로 발탁된 뒤 삼수군수(三守郡守북우후(北虞侯)를 역임하였다.

1618(광해군 10) 명나라가 후금을 칠 때 조선에 원병을 청해오자, 부원수 김경서(金景瑞)의 휘하에 좌영장(左營將)으로 있다가 이듬해 2월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을 따라 압록강을 건너 후금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명나라 군사가 대패하자, 3,000명의 휘하 군사로 수만명의 후금군을 맞아 고군분투하다가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그도 전사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신종(神宗)은 그가 용전분투하다가 장렬한 죽음을 당한 데 대한 보답으로 특별히 조서를 내려 요동백(遼東伯)에 봉하였으며, 처자에게는 백금을 하사하였다.

조정에서도 그의 전사를 가상히 여겨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