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충무(忠武)’ 시호를 받은 선조 – 2

녹전 이이록 2016. 7. 21. 08:34

충무(忠武)’ 시호를 받은 선조 2



카페나 블로그, , T!P등에 충무(忠武)’ 시호를 받은 선조님에 대하여 올린 글을 보면 아홉 분이 아니면 열두 분으로 올리고 있습니다.


이는 충무시호를 받은 조선시대 인물 아홉 분만 올린 경우와 고려시대 세 분과 조선시대 아홉 분 등 열두 분 모두를 올린 경우이기 때문입니다.


고려 시대 인물 - 지용수. 박병묵. 최필달


조선 시대 인물 - 조영무. 남이. 이 준. 이순신. 김시민. 이수일. 정충신. 구인후. 김응하


2, 박병묵[朴炳默, ? ~ ?]. 나주 박씨


나주박씨 시조 박병묵(시호 충무)은 고려 때에 평장사를 지냈으나 그의 선조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박병묵은 나주에 오랫동안 살아온 선비집안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나주로 하였다.

중조 박병묵(朴炳默)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후손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상계가 실전되어 분파 연원을 상고할 수 없다.

그는 고려조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나주(羅州)에 정착 세거하였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나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범박씨세보(汎朴氏世譜)>에 의하면 조선조에 나주목사를 지내고 좌정승에 추증된 박취생(朴就生)을 중조로 하는 다른 계통의 나주박씨가 있다고 하였으나 그 역시 전후 세계를 상고할 수 없다.


3, 최필달(崔必達, ?~?). 강릉 최씨
 

강릉최씨 시조 최필달(시호 충무)은 고려 때에 삼중대광으로 삼한벽상 개국찬화공신에 책록되어 영첨의 좌정승을 역임한 후 경흥군에 봉해졌다.

그의 선조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시조 충무공(忠武公최필달(崔必達)은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개국에 이바지한 공으로 삼중대광(三重大匡) 삼한벽상(三韓壁上) 개국찬화공신(開國贊化功臣)에 올랐다.

벼슬은 영첨의좌정승(領僉議左政丞)을 지냈으며 작호(爵號)를 강릉의 고호(古號) 경흥(慶興; 강릉의 별칭)부원군에 봉해지자 그 후손들이 강릉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사후에 충무공(忠武公) 시호를 받았다.

문무를 겸비한 학자로서 고려건국에 문교(文敎)와 도의(道義)의 선양에 크게 공헌하여 해동부자(海東夫子)라 일컬었다고 한다.

그 후 정묘정에 배향되었으며 1936년 그의 후손들이 篁山祠를 세우고 매년 3월 중정일(음력)에 제사를 올린다.

황산사 경내에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사람인 원정(遠亭) 최수성(崔壽城)의 사당인 무정묘(文正廟)가 황산사와 나란히 있다.

황산사는 원래 남문동에 있었으나 주변네 주택등의 건축물이 늘어남에 따라 1982년에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경주최씨상계세보에 보면, 그는 경주최씨의 시조 치원의 후손인 승로(承老)의 증손 이다


4. 조영무(趙英茂, ?~1414). 한양 조씨


본관 한양, 시호 충무(忠武)이다.

1392(공양왕 4) 이방원(李芳遠)의 명으로 조영규(趙英珪) 등과 정몽주(鄭夢周)를 개성 선죽교에서 격살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전중시판사(殿中寺判事)에 올라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고 한산군(漢山君)에 봉해졌다.

1394(태조 3) 중추원상의사(中樞院商議事), 1397년 충청도도절제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그 후 문하부 참찬사(門下府參贊事)에 승진하였다.

1400(정종 2) 도독중외제군사도진무(都督中外諸軍事都鎭撫)로 병권을 장악하여 제2차 왕자의 난에도 이방원을 도왔다.

삼군부 참판사(三軍府參判事) , 왕명으로 사병(私兵)의 혁파(革罷)가 실시되자 이를 반대하여, 황주(黃州)로 유배되었다.

곧 풀려나 서북면도순문사 겸 평양부윤(西北面都巡問使兼平壤府尹)으로 나갔다.

1405년 우정승(右政丞), 1408년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되고, 이듬해 훈련관도제조(訓練觀都提調)를 거쳐 삼군부영사(三軍府領事)가 되었다.

태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고, 죽은 뒤 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5, 남이(南, 1441~1468). 의령 남씨
 

본관 의령(宜寧). 시호 충무(忠武). 태종의 외증손(外曾孫)이다.

1457(세조3) 약관의 나이로 무과(武科)에 장원, 세조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다.

1467(세조13) 이시애(李施愛)가 북관(北關)에서 난을 일으키자 우대장(右大將)으로 이를 토벌,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오르고, 의산군(宜山君)에 봉해졌으며 이어서 서북변(西北邊)의 건주위(建州衛)를 정벌하고 28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한 후 대궐에서 숙직하던 중 혜성(彗星)이 나타난 것을 보고, 묵은 것이 없어지고 새 것이 나타날 징조라고 말하자, 그에게 항상 질투를 느껴오던 유자광(柳子光)이 엿듣고 역모를 획책한다고 모함하였다.

또한 남이가 여진토벌(女眞討伐) 때 읊은 시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속의 미평국(未平國)’이란 글귀를 미득국(未得國)’이라 하였다고 조작한 사실은 유명하다. 나라를 평정하지 못하면나라를 얻지 못하면으로 왜곡하여, 반역의 뜻이 있다고 모함받아 영의정 강순(康純) 등과 함께 주살(誅殺)되었다.

1818(순조18) 관작(官爵)이 복구되었다.


6, 귀성군 이준(龜城君 李浚, 1441~1479).


본관 전주(全州). 자 자청(子淸). 이름 준(). 시호 충무(忠武).

임영대군(臨瀛大君) ()의 아들. 1466(세조 12) 무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사도병마도총사가 되어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고, 이해 적개공신 1등이 되고,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에 특진되었다.

1468년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익대공신 2등에 훈봉되었다.

1470(성종 1) 어린 성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려 한다는 정인지(鄭麟趾) 등의 탄핵으로 경상도 영해(寧海)에 안치되어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숙종 때 신원되었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역시 조카였던 18세의 소년 귀성군(龜城君)함길강원평안황해사도(四道)병마도총사에 임명해 진압의 총책을 맡겼다.

()에는 영순군이, ()에는 귀성군이 쌍벽을 이룬다.고 매양 칭찬하던 세조는 이시애의 난이 진압된 다음해인 세조 14(1468)에 귀성군을 일약 영의정에 발탁했다.

조선이 개국한 이래 열아홉 살의 홍안 소년이 만인지상의 지위에 오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7, 이순신(李舜臣, 1545~1598) 덕수 이씨
 

본관은 덕수(德水)이고,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서울 건천동(乾川洞)에서 태어났다.

1572(선조 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이 넘어져서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고 실격하였다.

32세가 되어서야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練院奉事)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董仇非堡權管)과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를 거쳐 1583(선조 16) 건원보권관(乾原堡權管훈련원참군(訓鍊院參軍)을 지냈다.
1586(선조 19) 사복시 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造山堡萬戶)가 되었다.

이때 호인(胡人)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었다.

이후 1589(선조 22) 선전관과 정읍(井邑) 현감 등을 거쳐 1591(선조 24)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장군·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승진한 뒤, 좌수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분쇄하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 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加珙嘉明]의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熊川)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竹島)로 옮긴 뒤, 장문포 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97(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의 밑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했다.
그의 후임 원균은 7월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선조 31) 2월 고금도(古今島)로 진영을 옮긴 뒤, 11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무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와 시조·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德豊府院君)이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광해군 5)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於羅山)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忠臣門)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 등에 배향되었다.
유품 가운데 난중일기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는 국보 제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충무공유물은 보물 제326호로, 명나라 신종이 무공을 기려 하사한 충무충렬사 팔사품(統營忠烈祠八賜品)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다.

이밖에도 그와 관련하여 많은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삶은 후세의 귀감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문학·영화 등의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 난중일기가 전한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