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달한 가문 '백사집'
■ 현달한 가문 '백사집'
*인터넷 T!P에 올라 있는 질문에 답한 내용입니다.
[경주이씨 ‘백사공파’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 주세요. ‘백사공파’에 대한 가계도가 있으면 좀 올려주세요.]
답변) 이이록
「백사공파(白沙公派)」는 대파 「상서공파(商書公派)」에서 중파 「정헌공파(定獻公派)」로 분파되고 다시 소파 「백사공파」로 분파된 파명입니다.
중조(중시조) 25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을 파조(파시조)로 한 그 후손들입니다.
대파시조 상서공(휘 과)부터 백사공(휘 항복)까지의 계대는 아래와 같습니다.
◯ 중조 17세 상서공(휘 과) ~ 25세 백사공(휘 항복)의 계대
17세 -→ 18세 - → 19세 -→ 20세 -→ 21세 → 22세 → 23세 -→ 24세 - - → 25세
상서공...지주사공...판관공...참판공...첨추공....판관공...찬성공...정헌공........백사공
과.........원보.........승..........연손......숭수.......성무......예신.......몽량...........항복
상서공파(대파)..............................................................(중파)정헌공파.....백사공파(소파)
*중시조 17세 상서공(휘 과)이하 25세 백사공(휘 항복)까지의 인물은 ‘경주이씨 상서공파 종친회’ daum 카페에 들어가 인물 검색에서 찾아보기 바랍니다.
「백사공파」는 상서공(尙書公. 휘 과)아래에 ‘오신(五臣)집’이 유명하고 ‘오신집’속에 ‘백사(白沙)집’이 가장 현달하여 경주이씨 여러 집안 중에서 널리 알려진 으뜸 집안입니다.
아래의 표와 같이 조선 중엽이후 말까지 백사공(휘 항복)을 포함하여 영의정 4분. 좌의정 2분. 대제학 2명을 배출한 자랑스러운 집안입니다.
◈ 이항복(李恒福)
1556년(영조11년) ~ 1618년(광해군 10년). 조선의 문신, 정치가이다.
자는 자상(子常). 호는 백사(白沙). 필운(弼雲). 청화진인(靑華眞人). 시호는 문충(文忠),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영의정(領議政). 참찬(參贊) 몽량(夢亮)의 아들이다.
아래의 표는 오성부원군 백사공부터 ‘종’항렬까지의 백사공 후손 계대입니다.
◯ 중조 25세 백사공(휘 항복) ~ 38세 ‘종’항렬 후손의 계대
25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영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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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성남(星男)....................................정남(井男)..규남(奎男)..기남(箕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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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세 시중(時中)..시정(時挺)..시현(時顯)...시술(時術)...시육(時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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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세 세장(世章)....................세구(世龜)..세장(世長)..세필(世弼)..세희(世熙)..세춘(世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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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세 문좌(文佐)...........광좌(光佐)..........태좌(台佐)...정좌(鼎佐)...형좌(衡佐)....경좌(景佐)
┃...............................(영의정)............┃(좌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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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세 종악(宗岳)....................종성.................종주....종철....종적.....종엽.....종식
..........................................(宗城)..............(宗周)...(宗喆)...(宗迪)...(宗燁)..(宗植)
┃......................................(영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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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세 경일(慶一)....(계자)경륜(敬倫)..(계자)경관(敬寬)..(출계)경관(敬寬)..경양(敬養)..경함(敬涵)
┃......(좌의정)...............┃....................┃
32세.............................정규(廷奎).........석규(錫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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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세.............................계선(繼善)..계헌(繼憲)....계조(繼朝)..계홍(繼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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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세........................... 유승(유승).....................유원(유원)
┃................................┃.................................(영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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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세...........건영(健榮)..석영(石榮)..철영(哲榮)..회영(會榮)..시영(始榮)..소영(韶榮)
┃...............................................................(독립운동가) (초대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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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세...........................┏--------┳--------┳-------┳--------┓
┃...............................규룡(圭龍)..규원(圭媛)..규학(圭鶴)..규숙(圭淑)..규창(圭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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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세.............................................................종찬(鍾贊) (국회의원. 국정원장)
[백사(白沙)집]
‘오신(五臣)집’ 중 찬성공(贊成公) 예신(禮臣)의 차손(次孫)인 정헌공(定獻公)의 4자 오성부원군(鰲城府院君) 항복(恒福)의 가계(家系)를 가리키는 말이다.
백사공은 임란 중에는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를 맡아 왜노(倭奴)의 침략을 승리로 이끌었고 난후에는 호성일등공신에 책록(冊錄) 되었으며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니‘성만(盛滿- 벼슬과 명예가 가득한 것)’이라 하여 선조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양하여‘대신(大臣)의 퐁도(風度)’를 보였다.
공의 현손 광좌(光佐)와 태좌(台佐)는 각각 영의정과 좌의정에 이르렀고 태좌의 아들 종성(宗城)은 영의정이었으며 6대손 경일(敬一)도 좌의정이었고 9대손 유원(裕元)도 영의정이었다.
광좌(光佐)는 숙종∼영조 때 소론(少論)의 중진으로 40여년 벼슬길에서 영의정을 세 번, 대제학을 세 번이나 역임했으며, 글씨와 그림에도 능했다.
문집 『운곡실기(雲谷實記)』가 전한다.
광좌의 8촌형인 태좌(台佐) 또한 소론인데, 영조 때 좌의정에 올라 3종형제가 어깨를 나란히 하여 노론(老論)과 맞섰다.
그의 아들 종성(宗城)이 뒤를 이어 좌의정을 지내고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는데, 이 무렵에 조선조에서 경주이씨(慶州李氏)가 가장 성시(盛時)를 누렸다.
오천(梧川) 종성(宗城)은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내고 장조(莊祖- 莊獻世子장헌세자) 묘정에 배향되었다.
오천은 영조 3년 증광문과에 급제, 영조 4년 경상도 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가 되어 민폐를 일소하였다.
영조 12년 이조판서(吏曹判書)로 탕평책(蕩平策)을 반대하다가 파직되었으나 다시 기용되어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 도승지(都承旨). 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지내고 영조 20년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영조 29년 좌의정(左議政)에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다가 사직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죽었다.
성리학(性理學)에 밝고 문장에 뛰어났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유원(裕元)은 대원군(大院君)에 맞선 보수정치가로 대원군의 개혁정치에 반대하고 파직 당했다가 대원군 실각 후 영의정이 되어 대원군 공격의 선봉이 되었다.
1882년 운양호(雲揚號)사건으로 일본세력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문호를 열게 될 때 전권대신으로 제물포(濟物捕)조약에 조인했다.
글씨에 일가를 이루었는데 특히 예서(隸書)를 잘 썼고, 『임하필기(林下筆記)』, 『귤산문고(橘山文稿)』등 저술을 남겼다.
역시 백사공의 9대손 유승(裕承)은 좌찬성이었는데 6형제를 두었던바 건영(建榮). 석영(石榮- 유원의 아들로 출계). 철영(哲榮). 회영(會榮). 시영(始榮). 소영(韶榮)이었는데, 한일합방이 되던 해에 6형제가 함께 가솔을 거느리고 망명하여 만주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설립하고 3,500여명의 독립군을 양성하여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와 청산리 전투(靑山里戰鬪)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특히 회영(會榮)과 시영(始榮)은 3·1운동을 주도하였고 시영(始榮)은 임시정부(臨時政府)의 법무총장(法務總長). 재무총장(財務總長). 의정원장(議政院長)을 맡아 일본(日本)의 박해속에서 임시정부(臨時 政府)을 지켰다.
광복 후에 5형제를 이국(異國)의 땅에 묻고 참담한 심경으로 홀로 환국(還國)한 시영(始榮)은 국명(國名)을‘대한(大韓)'으로 할 것을 주장하여 관철하는 등 정부수립(政府樹立)을 주도하고 초대부통령(初代副統領)에 당선되었으나 임기 1년을 남기고 이승만(李承晩) 정권의 부정·부패와 독재에 맞서 사퇴하고 이듬해에 민주주의(民主主義)를 갈망하는 국민의 성원에 못이겨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경주이씨 상서공파 홈페이지 참고. 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