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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이씨’와 ‘월성이씨’는 ‘경주이씨’이다.

녹전 이이록 2016. 3. 7. 09:19

계림이씨월성이씨경주이씨이다.



아래와 같은 글이 인터넷에 올라 있습니다.


내용 중 본문에 문제가 되는 부분을  *로 표시하고 아래쪽에 [...........]로 나타낸 다음 소견을 올립니다.


*계림이씨 -> 월성이씨 -> 경주이씨로(현재)


*경주이씨 56세손 되시는 諱之秀(휘 지수) 공께서 월성이씨의 시조이신 것으로 말씀하신듯한데 이것은 사실과는 다릅니다.


제가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경주이씨와 월성이씨는 동일한 가문의 서로 다른 명칭입니다.


경주이씨는 신라초기에는 급량부 이씨 등으로 불렸고 *고려시대에는 계림이씨, 월성이씨, 경주이씨 등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주이씨로 불렸지만 간혹 월성이씨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월성이씨가 경주이씨의 분적종이라서가 아니라 같은 가문을 좀 더 색다르게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는 많지만 가장 대표적인 경우로는 전주이씨를 완산이씨로, 밀양박씨를 밀성 박씨로, 진주강씨를 진양강씨 혹은 晉山姜氏(진산강씨) 등으로 부르는 경우와 같습니다.


다만 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가문들 중에서 경주김씨와 월성김씨, 경주최씨와 월성최씨, 경주박씨와 월성박씨는 서로 다른 가문입니다.


이들 가문은 본종과 분적종의 관계입니다.


이에 비해서 경주정씨와 월성정씨, 경주손씨와 월성손씨, 경주석씨와 월성석씨 등은 동일한 가문의 서로 다른 명칭입니다.


위에서 지적하신 내용 중에서 *경주이씨 56세손 휘 지수 공의 후손들이 월성이씨로 분적한 것이 아니라 경주

이씨 월성군공파로 남아 있습니다.


이 파도 경주이씨입니다.


경주이씨에서 분적한 가문이 아니라는 것을 참고하여 주셨으면 합니다.


다만 원주이씨는 경주이씨의 분적종이 맞습니다.


[계림이씨 -> 월성이씨 -> 경주이씨로(현재)]


소견)


처음에는 계림이씨라 불리다가 뒤에 월성이씨로 부르고 월성이씨에서 지금은 경주이씨로 불리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고려 말 익재공(휘 제현)의 묘지(墓誌)에서 소판공(휘 거명)이하 계대가 알려짐으로써 고려 초부부터 경주로 불리던 지명을 따서 경주이씨로 불리었던 것입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기록에 유리왕 9(서기 32)6(혹은 6)6부로 개칭하면서 양산촌(혹은 양산부)를 급량부로 개칭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급량부 이씨라고 하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신라시기에는 국명과 지명으로 현재의 경주를 진한. 사라. 사로. 서나벌. 서야벌. 계림. 신라. 월성. 금오. 문천으로 불리기도 하였고 군명으로도 사용하였으니 위의 지명을 따서 성씨를 말하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문헌이나 비석에 나오는 옛 지명 계림, 월성은 당시의 지명을 붙여 계림이씨. 월성이씨라고도 하였을 것이고 고려 초에 와서 경주라고 하였으므로 경주이씨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도 일부에서는 고풍스럽고 예스런 계림이씨, 월성이씨라고도 하였던 것입니다.


계림이씨 월성이씨 경주이씨 순으로 성씨를 바꾸어 말한 것이 아니고 오래전에 계림’. ‘월성으로 불리던 경주를 고풍스럽게 나타낸 것입니다


[경주이씨 56세손 되시는 諱 之秀(휘 지수) 공께서...]


소견)


월성군(휘지수)은 중시조 21세로 중시조 12세에서 군윤공(휘 선용)의 동생 시랑공(휘 신우) 계대의 9세손입니다.


월성군(휘 지수)시조의 56세손이 아닙니다.


시조세수는 시조의 아랫대부터 계대가 실전되어 알 수 없으므로 시조세수로는 말하지 않습니다,


‘35대로 된 실전세계‘35상계 계대는 사실적이지 않는 계대입니다.


‘35상계 계대의 시조 35세에다 중조 21세인 월성군(휘 지수)의 중시조세수 21세를 더하여 35+21=56. 시조 56세로 읽고 =세손으로 읽어 56=56세손으로 읽은 것입니다.


시조의 56세손이 아닌 중시조 21’. ‘중시조님의 20세손으로 읽고 말을 해야 바르게 말하는 것입니다.


월성군(휘 지수)은 중조(중시조) 21세로 중조 12세 군윤공(휘 선용)의 동생인 시랑공(휘 신우)9세손(=9대손)이고 중조 17세 사정공(휘 극량)의 현손(玄孫)입니다.


경주이씨 중시조 21(아니면 중시조의 20세손) 되시는 諱 之秀(휘 지수) 공께서...’라고 기술하여야 합니다.


[경주이씨는 신라초기에는 급량부 이씨 등으로 불렸고..]


소견)


. 그렇습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빌린다면 서기 32년 유리왕 9. 6촌을 6부로 개칭하면서 성씨를 사성하였다면 급량부 이씨로 불렀을 것입니다.


경주를 상고시대에는 진한 12국 중 사로국이라 칭하고 BC 57년 박혁거세의 신라 개국 건도시에 국호로 서야벌. 서나벌. 서라벌. 사라. 사로로 불리었다가 탈해왕 시대에는 시림’. ‘계림이라 부르고 기림왕 때는 신라라 불리었으니 이 지명을 붙여 ◯◯이씨로 불렀을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는 계림이씨, 월성이씨, 경주이씨 등으로 불렸으며...]


소견)


위와 같이도 불리었을 것입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 18(935)에 신라 경순왕(김부)이 신라를 받들어 항복하였으니 이때부터 이 땅을 경주라 하였고. 성종(987)때는 동경’. 현종(1012) 때는 경주’. ‘동경’. 신종 때는 동경’. ‘경주’. 고종 때는 동경’. 충렬왕(1308)때는 계림’. 신우(우왕) 때는 낙랑으로 불리었으니 이 지명을 따서 ◯◯이씨로 불리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경주이씨로 불렸지만 간혹 월성이씨등으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소견)


조선시대 태종(1413) 때에 다시 옛 지명인 경주로 불리었으니 경주이씨로 불리었을 것이고 일부는 예스럽고 고풍스러운 지명인 계림이씨. 월성이씨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비문에도 '鷄林李氏(계림이씨)' . '月城李氏(월성이씨)'라고도 남겼습니다.


(경주 연혁에 대한 자료 추가)


근세에 들어와 1895년 경주군으로 개칭.

1931. 4. 1 경주면이 읍으로 승격.

1937. 7. 1 감포읍으로 승격.

1955. 9. 1 경주읍이 경주시로 승격, 군 명칭을 월성군으로 개칭.

1989. 1. 1 월성군이 경주군으로 개칭.

1995. 1. 1 통합 경주시 출범.


[경주이씨 *56세손 휘 지수 공의 후손들이...]


소견)


‘경주이씨 56세손 휘 지수공중시조 21세 휘 지수공으로 고쳐 읽어야 합니다.


'56세손'은 '시조세수'로 읽은 것입니다.


중시조세수 21세에 시조세수 35세를 더하여 21+35=56. 56세는 '세=세손'으로 같은 뜻으로 읽어 56세=56세손으로 읽은 것입니다.


그러나 시조세수 35세 상계 계대는 사실적이지 않아 이 계대를 활용하여 시조세수로는 헤아려 말하지 않습니다.


중조 21세 월성군(휘 지수)을 파시조로 하여 14개 대파 중의 하나인 월성군파’로 분파한 것입니다.


이 월성군파가  월성이씨분적한 분적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경주이씨에서 분적한 분적종이 아니고 분파한 14대파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다만 신원주이씨는 경주이씨의 분적종이 맞습니다.


* 신원주이씨 추가자료


중조 21세 월성군(휘 지수. 월성군파 파조)의 동생인 시랑공(휘 지연)의 손자인 중조 23세 경원군(휘 반계)이 분관하여 분적종 원주이씨 분적조(분관조)가 되십니다.


(정리)


게림이씨. 월성이씨는 경주이씨를 이르는 말로 옛 신라시대 지금의 경주를 계림’ . ‘월성이라고도 하였으므로 후손들이 지금도 고풍스럽게 경주대신 계림’ . ‘월성이라는 지명을 따서 계림이씨’ . ‘월성이씨라고 한 것입니다.


반면 월성군파는 중시조 12세에서 계대가 갈라져 나온 시랑공(휘 신우)9세손인 중조 21세 월성군(휘 지수)이 경주이씨 14개 대파중 하나인 월성군파로 분파하여 그 파조(파시조)입니다.


월성군파는 경주이씨의 14개 대파 중 한 대파이고 월성이씨는 경주의 옛 지명을 따서 '경주이씨'를 말한 것이기 때문에 월성군파’를 월성이씨와 연관 지어 말하는 것은 잘못된 내용임에 유의하여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