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이씨 4대의 육가(六歌) - 7
■ 경주이씨 4대의 육가(六歌) - 7
◈ 옥화구곡(玉華九曲)
경주이씨 4대가 기거하고 육가를 탄생시킨 충북 청원군 미원면 옥화대(옥화구곡 수계)에 대한 글이 있어 이도 자료로 올린다.
◈ 옥화구곡(玉華九曲)
- ‘충청 백두대간 7백리를 가다.’ - 조혁연 기자
이에 대한 연구가 깊어져 종전에 ‘九景(구경)’으로 알려진 것이 ‘九曲(구곡)’으로 밝혀졌다.
즉 ‘六歌(육가)’의 고향인 이곳의 지명이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에 의해 현재 부르는 구경(九景)이 아닌 九曲(구곡)으로 밝혀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이름 옥화(玉華) 그대로 물과 암벽이 멋진 조화를 이뤘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옥화대는 단순 자연발생 유원지가 아닌, 조선 선조 때의 인물인 이득윤(李得胤)에 의해 구곡(九曲)이 설정된 곳이다.
뿐만 아니라 시조의 한 장르였던 ‘육가(六歌)가 경주이씨 4대에 걸쳐 가문적으로 창작된 장소이다.
이상주(51ㆍ한문학 박사) 구곡 전문가의 논문 ‘옥화 구곡과 옥화 구곡시’(충북학 제 3집ㆍ2001년)에 따르면 청원군 미원면 일대 9곳에 ‘옥화구곡’을 설정한 인물은 앞서 언급한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 1553~1630)이다.
본관이 경주 이씨인 서계공(西溪公)은 선조(宣祖)의 신임이 두터워 왕자들의 스승인 ‘왕자사부’(王子師傅)을 지냈고, 음악과 주역에도 매우 밝았다고 옛 문헌은 기술하고 있다.
괴산군수를 지내기도 했다.
서계(西溪) 는 중앙 정계가 어수선해지자 17세기 초 고향이 있는 미원면으로 낙향, 옥화대를 남북 방향으로 흐르는 박대천을 따라 하류에서 상류 방향으로 1곡 만경대(萬景臺), 2곡 후운정(後雲亭), 3곡 어암(漁巖), 5곡 옥화대(玉華臺), 6곡 천경대(天鏡臺), 7곡 오담(鰲潭), 8곡 인풍정(引風亭), 9곡 봉황대(鳳凰臺)를 각각 설정했다.
이중 옥화대는 ‘옥구슬이 떨어진 듯 아름답다’는 뜻이고, ‘오담(鼇潭)’은 자라가 많이 살아서 붙여진 지명이다.
현재 옥화구곡 중 제 5곡인 옥화대에는 옥화서원, 기암절벽, 휘청거린 낙락장송, 관간정(冠簡亭), 세심정(洗心亭), 추월정(秋月亭) 등이 존재하고 있다.
암각 글씨가 없는 점이 다소 아쉬우나 구곡(九曲)의 구성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는 셈이다.
이와 관련 도내 유일의 구곡(九曲) 전문가인 이 박사는 괴산 화양구곡 발견 후 구곡문화 규명작업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미원 옥화대 일대에도 지난 1609년 이득윤(李得胤. 당시 57세)에 의해 주자(朱子)의 무이구곡(
武夷九曲)을 모방한 옥화구곡(玉華九曲)이 설정됐음을 밝혀냈다
조사 결과 서계공(西溪公)의 직손인 이필영(李苾榮ㆍ1853~1930)과 이규익(李奎益ㆍ1884~1972)이 지난 1921년 선조들의 업적을 ‘경주이씨 세적보견’(慶州李氏世跡補遣)이라는 책으로 정리했고 그 안에 옥화구곡 한시가 존재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두 사람의 한시는 ‘一曲이라’ . ‘二曲이라’ 식으로 옥화구곡의 빼어난 경관과 계절성 그리고 안빈낙도적인 삶을 노래하는 한편 집안의 큰 인물이었던 서계 이득윤을 칭송하고 있다.
이중 옥화구곡 존재의 결정적인 근거가 되는 한시는 9개의 구곡시중 ‘서시’이다.
‘구곡의 여울물에 가을 달빛 비치니’라는 구절이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 국문학사는 신라 향가, 고려 장가, 조선 시조 순으로 발전했다.
이중 고려시대에 싹이 튼 시조는 조선시대 들어 활짝 만개, 빼어난 작품이 많이 쏟아지게 된다.
작품수도 무려 2천여 개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일반인이 잘 모르고 있는 시조 장르 중에 ‘육가(六歌)라는 것이 16~17세기 공간에 자리 잡고 있다.
육가는 평시조 6개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고 있는 형태로, 퇴계 이황의 ‘도산십이곡’도 육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바로 이 육가가 탄생한 곳이 미원 경주이씨가 4대에 걸쳐 거주했던 옥화대이다.
성균관대 임형택(한문교육과) 교수의 논문 ‘17세기 전후 육가형식의 발전과 시조문학’과 이상주 씨의 ‘이득윤과 서계육가ㆍ옥화육가의 창작시대’(수록 한국의 경학과 한문학)에 따르면 16~17세기 옥화대 일대에는 이별(李鼈. ?~?), 이정(李淨. ?~1594), 이득윤(李得胤), 이홍유(李弘有. 1588~1671) 등 경주이씨 4대가 연이어 살았다.
이들 4대가 남긴 육가는 시대 순으로 이별의 ‘장육당 육가’, 이정의 ‘풍계 육가’, 이득윤의 ‘서계 육가’ㆍ‘옥화 육가’, 이홍유의 ‘산민 육가 등으로 이중 ‘풍계 육가’와 ‘산민 육가’가 중세 한글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 4대는 자녀와 제자를 가리키는 목적으로 교육과 수양의 내용이 담긴 육가를 창작, 정자와 서원이라는 공간을 통해 이를 노래로 불렀다.
이처럼 이들이 육가에 각별한 관심을 가진 것은 “음악을 감성의 정화요소로 여겼기 때문”이라고 임 교수는 밝히고 있다.
따라서 그는 “퇴계의 도산십이곡은 이별의 육가를 내용면은 부정하고 형식면은 계승한 작품”이라며 따라서 “옥화대는 우리나라 국문학사, 특히 시조사를 논할 때 매우 중요한 위치를 지닌다.”고 밝히고 있다.
▲ 옥화구곡 서시 전문
天藏地秘玉華開
先世槃停已摠裁
九曲灘頭秋月映
漁人不敢棹歌廻
하늘 감춰지고 땅은 비밀인 곳에 옥화구곡 펼쳐졌다
선조 서계 선생이 노니시며 이미 구곡을 모두 정했네
구곡의 여울물에 가을 달빛 비치니
어부는 감히 뱃노래를 되돌리지 못하네.
▲ 옥화구곡 제3곡 시,
三曲寒流百尺巖
漁郞倚棹晝眼酣
江兒喚起斜陽外
白鳥雙飛水盡南’
삼곡이라 차가운 냇물이 감도는 백척 바위
어부는 노에 기대어 한낮 단잠을 자고 있네
석양 멀리서의 아이들 소리에 잠깨어 보니
백조 한쌍 날아가고 물은 남쪽으로 흐르네
◈ 산수문화(山水文化) 八景은 있어도 九景은 없다.
- 청원군이 설정한 ‘옥화구경(玉華九景)’
청원군은 지난 1990년 군정 자문회의의 자문을 받아 1경 청석굴, 2경 용소, 3경 천경대, 4경 옥화대, 5경 금봉, 6경 금관숲, 7경 가마소뿔, 8경 신선봉, 9경 박대소 등 이른바 ‘구경’(九景)을 설정하고 안내판을 설치했다.
그러나 청원군은 여러 정황상 옥화대 일대에 조선시대 ‘구곡’(九曲)이 이미 설정돼 있는 사실을 모른 채 이를 확정한 것으로 보여 지고 있다.
서계(西溪) 이득윤(李得胤)에 의해 설정된 미원면 일대의 구곡(九曲)은 박대천 하류에서 상류 방향으로 30리 수계에 설정돼 있다.
이에 비해 90년대 설정된 구경(九景)은 그 반대인 상류에서 하류 방향으로 20리 안에 분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증 없이 구경을 설정하다 보니 일부 지명에 혼선이 나타나고 있다.
구곡(九曲) 개념대로라면 옥화대는 제 5곡, 천경대는 제 6곡이다.
그러나 구경(九景)에서는 이를 제 4경과 3경으로 각각 명기하고 있다,
이른바 ‘구경(九景)’은 단순히 경관(景觀)의 개념을 지닌다.
이에 비해 ‘구곡(九曲)’은 ‘경관 + 인문’의 가치를 포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산수문화 개념에서는 ‘팔경’(八景- 예. 관동팔경. 단양팔경)은 존재하나, 구경(九景)은 존재하지 않는다.
청원군은 옥화대 일대의 ‘구경’을 ‘구곡’으로 바꾸는 등 이번 기회에 이를 수정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야 옥화대 일대는 단순 경관성을 넘어 ‘경관 + 인문’의 가치로 되살아 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