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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와 파조(파시조)

녹전 이이록 2015. 12. 28. 10:37

시조와 파조(파시조)

 

 

[*경주이씨 석탄공파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이나(시조 말고요) 지금 이름이 난 사람을 알려주세요.

 

*석탄공파의 시조는 이알평인가요. 아니면 이존오인가요.

 

만약 이존오라면 이알평은 석탄공파의 시조가 아닌가요?

 

아니면 이알평이라면 이존오는 그냥 석탄공파를 만든 사람인가요?]

 

답변) 이이록

 

[경주이씨 석탄공파에서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이나(시조 말고요) 지금 이름이 난 사람을 알려주세요.]

 

소견)

 

종친님은 석탄공파이기는 한데 이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경주이씨의 뿌리. 유래. 근원 등과 직계나 방계의 윗대 조상님에 대하여 천천히 공부하여 알아두어야 할 것입니다.

 

석탄공파에서 유명한 분은 역시 석탄공파 파시조님이신 석탄공 휘 존오 할아버지를 빼 놓고는 말할 수 없는 제일 유명한 조상님입니다.

 

또 한 분은 석탄공의 아들인 이래(李來) 할아버지입니다.

 

아래에 시조님과 이존오, 이래 두 분 할아버님의 행적을 올리니 참고 하세요.

 

시조님(표암공 휘 알평)과 석탄공(석탄공파 파시조)

 

우리 경주이씨의 시조님에 대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경주이씨 시조님은 표암공 휘 알평 할아버님입니다.

 

지금으로 부터 약 2000여 년 전 신라 건국 전후에 생존하셨던 할아버님입니다.

 

박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하여 신라를 건국할 때 사로 6촌의 촌장이었고 6촌장의 수장으로 화백회의를 주재하셨으며 신라 건국 원훈으로 좌명공신이었고 관직은 아찬(6관위)으로 군무를 장악했습니다.

 

유리왕 9년 서기 32년에는 6촌이 6부로 양산촌에서 급량부로 개칭할 때 왕이 6부에 성을 사성했으니 급량부(밑돌부)는 이씨 성을 사성(賜姓)받았습니다.

 

석탄공은 시조님으로 부터 1400여년후의 인물로 중시조 10세 부사공(휘 춘정)의 동생인 문하시랑공(휘 춘림)9세손인 고려 말 공민왕 때 활동하셨던 중시조 19세 석탄 이존오를 대파시조로 하는 대파 석탄공파 파시조(파조)이십니다.

 

[석탄공파의 시조는 이알평인가요 아니면 이존오 인가요?

 

이존오라면 이알평은 석탄공파의 시조가 아닌가요?

 

아니면 이알평이라면 이존오는 그냥 석탄공파를 만든 사람인가요?]

 

소견)

 

우리 경주이씨 시조님에 대하여는 위에서 간단히 언급하였습니다.

 

시조님은 시조님이고 파조님(파시조)은 파조님입니다.

 

시조님은 표암공(휘 알평) 할아버님이시고 석탄공파의 대파시조(대파조. 파조)는 휘 존오 할아버님입니다.

 

휘 존오 할아버님은 호가 석탄(石灘)으로 호를 따서 대파명을 석탄공파로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시조님은 전체 경주이씨 모두의 시조님’이고 석탄공파 파조는 석탄공파의 시조가 아니고

'석탄공파 대파시조(대파조. 파조)'입니다.

 

석탄공(휘 존오) 할아버님은 신라 초 시조(표암공 휘 알평)이후 1400여년 후인 고려 말엽에 생존하였던 할아버님으로 중시조(소판공. 히 거명. 신라 말)로부터 19세이며 대파 석탄공파 파시조(파조)입니다

 

아래와 같이 다시 정리를 합니다.

 

경주이씨 시조님은 진한(사로) 6촌 촌장 중의 한 분이신 표암공( 휘 알평)입니다.

 

신라 3대 유리왕 9(서기32)6(혹은 6)6부로 개칭할 때 양산촌(혹은 양산부)를 급량부(밑돌부)로 개칭하면서 이씨 성(李氏姓)을 사성(賜姓)받았습니다.

 

그리고 고려 말 목은 이색 선생이 찬한 중시조 17세 익재공(휘 제현)의 묘지(墓誌)에 시조로부터 약 900년 후인 신라 말경에 활동하였던 소판공(휘 거명)이 시조이후 최초로 거명된 경주 이씨이기 때문에 후손들이 중시조로 받들고 있습니다.

 

이후 1세 중시조(소판공 휘 거명)로부터 19세에 와서 석탄공(휘 존오)이 고려 말에 활동하였으니 시조로부터 대강 1400년 후에 태어났고 대파 석탄공파로 분파한 대파 파조(파시조)인 것입니다.

 

시조 알평(표암공. 신라초) 

 

1세 중시조 이거명(소판공. 신라말) 

 

19세 석탄공파 대파시조(대파조. 파조) - 이존오(석탄공. 고려말 - 경주이씨 14대파 중 하나).

 

이존오(李存吾) 족보 행적기록

 

자는 순경(順卿) 호는 석탄(石灘) 충혜왕 신사(辛巳. 1341)에 출생.

 

어렸을 때에 여주(驪州) 고산(孤山)에 우거(寓居)하여 대대로 살았다.

 

일찍이 부모를 여이고 학문에 힘썼으며 강개(慷慨)한 지절(之節)이 있었다.

 

10살 때 강물이 창일(漲溢)함을 읊은 글에 이르되

 

'큰 들이 다 물에 잠겼었네.

고산(孤山)은 홀로 항복하지 않았다.'

 

하니 식자(識者)들이 달리 여기더라.

 

20세인 공민왕 9년 경자(更子. 1360)에 국자 진사(國子進士)로 문과에 올라 사한(史翰)에 선보(選補- 선발되어 보임됨)되고 정몽주(鄭夢周) 박상충(朴尙衷) 등 제현(諸賢)으로 더불어 도의에 벗이 되다.

 

26세인 병오(丙午. 1366)에 우정언(右正言)이 되어 정추(鄭樞)와 신돈(辛旽)을 소척(疏斥)하다가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니 장사(長沙)는 지금 무장현(茂長縣)이라 부여(扶餘)의 석탄(石灘)에 돌아와 분함과 근심으로 병을 이르니 말하여 가로되

 

'신돈이 망해야 내가 이에 망하리라.'

 

하더니 드디어 공민왕 신해(辛亥. 1371)에 졸()하니 향년(享年)31세이라. ()이 졸()한 후 석 달에 신돈이 과연 해임을 당했다.

 

왕이 그 충절을 생각하사 판삼사 대사성(判三司大司成)을 증직(贈職)하니 이 사실이 고려사(高麗史)’삼강 행실(三綱行實)’에 실렸다.

 

충절이 숙묘조(肅廟朝) 어찬(御撰)에 까지 나타났고 문집이 있어 세상에 행하다.

 

묘는 개성 고동문(開城古東門)밖 십리 되는 곳인 장단(長湍) 땅 대덕산(大德山) 남약 사원(南藥師院) 북쪽에 자좌(子坐)이며 무장(茂長)의 충현(忠賢)과 부여의 의열(義烈)과 공주(公州)의 공암(孔巖)과 여주(驪州)의 고산(孤山) 등 여러 원()에 배향(配享)하고 정문(旌門)을 부여로부터 과천 암산동(果川巖山洞)에 이전하였다.

 

배는 여흥 민씨(驪興閔氏) 판도판서(版圖判書) ()의 녀(). 대제학(大提學) 상정(祥正)의 손()이고 대제학(大提學) () 증손(曾孫)이며 찬리(贊理) 양경공(良敬公) 전주(全州) 최문도(崔文度)의 외손(外孫)이다.

 

묘는 개성 남문(開城南門)밖 십리허의 호현(虎峴) 북쪽에 있다.

 

이존오(李存吾) - 인물 검색

 

1341(충혜왕 복위 2)~1371(공민왕 20)

 

석탄공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써 10여세에 12()에서 공부하고 20세에 문과에 급제, 사한(史翰)으로 있을 때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이숭인(李崇仁) 등과 학문을 토론했으며 정언에 이르렀을 때에 신돈(辛旽)이 집권하여 횡포를 일삼는데 누구도 감히 나서서 신돈의 방자와 음탕을 나무라지 못하였다.

 

때에 공이 분연히 나서서 왕에게 글을 올려 신돈을 처 죽여야 한다고 탄핵의 글을 올렸다가 도리어 왕의 노여움을 사서 매우 위급했었는데 이색(李穡) 등의 힘으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고 후에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울분으로 죽었다.

 

뒤에 왕이 공의 충성을 깨닫고 성균관 대사성을 추증했다

 

이래(李來)

 

1362(공민왕 12)~1416(태종 16).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다.

 

초명은 (), 자는 낙보(樂甫). 존오(存吾) 아들이다

 

뒤에 공민왕이 아버지 석탄공의 충성을 깨닫고 성균관 대사성을 추증한 뒤 그의 아들 이래(李來)에게 10세의 어린 나이로 전객녹사(典客綠事) 특임되고 1383(우왕 9) 문과에 급제, 우사의 대부에 올랐다.

 
1392(공민왕 4) 정몽주의 일당으로 몰려 계림(鷄林)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렸고 조선 시대 1399(정종 1) 좌간의대부이듬해 방간(芳幹)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추충좌명공신(推忠佐命功臣) 2등에 책록 되었고 계림군(鷄林君) 책봉되었다


1402(태종 2) 대사간을 거쳐 공조판서에 오르고 1404 정조사(正朝使) 명나라에 다녀온  대사헌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되었고 1407년에 죄빈객이듬해에 지의정부사  판경승부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경절(景節)이다

 

태종 묘정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