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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알기 쉬운 경주이씨 씨족사 – 2

녹전 이이록 2021. 8. 3. 08:52

보다 알기 쉬운 경주이씨 씨족사 2

 

모 블로그에 보다 알기 쉬운 경주이씨 씨족라는 제목의 글이 아래와 같이 올라 있습니다.

 

많은 경주이씨에 대한 글에 잘못된 내용이 너무나 많이 서술되어 있습니다.

잘못된 내용은 원문에 * 표시를 하고 뒤에 수정하여 올립니다.

 

정묘보(丁卯譜)’ 상계(上系)에는 중시조 이거명(李居明)이 소판(蘇判)이었고, 아들 이금현(李金現)은 병부령(兵部令)을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판(蘇判)이나 병부령(兵部令)은 신라시대에 진골(眞骨)만이 할 수 있는 관등(官等)ㆍ관직(官職)이었다.
*3세조인 3세 이금서(李金書) 때에 이르러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였다하는데, *4세조 4, *5세조 5는 각각 병정(兵正)ㆍ정조시랑(正朝侍郞)을 지냈다 한다.

 

*병정(兵正)은 향리직명이고, 정조(正朝)는 고려 향직(鄕職)에서 정7(正七品)의 관계(官階)이다.
*4세조 4. *5세조 5. 가 경주(慶州)나 혹은 어느 군현(郡縣)에서 향직(鄕職)에 종사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향리출신이 아니었는가 추측된다.

 

*6세조 6. 이주복(李周復) 이후는 중앙관직을 띤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12세조 12 이선용(李宣用), *13세조 13이승고(李升高)의 경우에는 고려 향직(鄕職)인 군윤(軍尹)ㆍ보윤(甫尹)을 지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진은 충렬왕 6년에 친시문과(親試文科)에서 제 2등으로 붙었는데 동생 이세기(李世基)는 제 3등으로 붙었다.
밀직승지(密直承旨), 전법판서(典法判書),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충선왕이 즉위한 후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다.

충숙왕 2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었고 검교정승(檢校政丞)이 되어 임해군(臨海君)에 봉해졌다.

 

이세기(李世基)는 밀직부사(密直副使)ㆍ대제학(大提學)을 지내고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이르렀다

 

경주이씨(慶州李氏)에서 고려조의 인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임해군(臨海君)의 아들이며,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외교가ㆍ문장가였던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이다.
그는 *충선왕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 일곱 임금을 섬기며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겼는데, 우리나라 주자학(朱子學)의 개척자인 백이정에게서 배웠다.

 

충렬왕 27년 성균시(成均試)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아갔다.

충선왕이 왕위를 물려주고 연경(燕京)에 만권당(萬卷堂)을 세워 그를 불러들이자 연경(燕京)에 가서 원()나라의 학자인 요수(姚燧)ㆍ기맹부 등과 함께 고전(古典)을 연구했다

 

이듬해 선부의랑(選部議郞), 성균좨주(成均祭酒)가 되고, 1316년 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에 승진하였다.
1319년 충선왕을 따라 강남(江南)을 유람하고 이듬해 지밀직사(知密直事)에 올라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이 되었다.

 

충선왕이 토번에 유배되자 원() 조정에 그 부당함을 상소하였고, 뒤에 심왕(瀋王) ()의 고려 왕위계승을 위한 오역사건으로 충숙왕이 잡혀가자 연경에 가서 이를 해명하고 이듬해 귀국해서 향리에 은거했다.

 

충혜왕이 원()에 잡혀갔을 때 글을 올려 사면을 청했다.
충선왕이 아들에게 고려왕위를 물려주고 조카 고()에게 심왕위(瀋王位)를 물려준 후 공민왕이 즉위할 때까지 원()정권에 의한 고려 왕위의 폐위, 복위가 반복될 때 일선에서 고려국의 왕위보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한 충성의 인물이다.

 

공민왕이 즉위하여 우정승(右政丞)ㆍ권단 정동성사(權斷征東省事)로 발탁,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을 지냈다.
이듬해 동덕협의 찬화공신(同德協議贊化功臣)에 오르고, 1353년 사직했다가 다음 해 우정승(右政丞)으로 재임, 1356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이어 관직을 사직하고 저술(著述)과 학문(學問)에 전심하다 1362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왕()을 청주(淸州)로 호종(扈從),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지고 만년에 은퇴한 후 왕명으로 실록(實錄)을 편찬했다.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다.

 

당대의 명문장(名文章)으로 외교문서(外交文書)에 뛰어났고, 민간가요(民間歌謠) 17()를 한시(漢詩) 7언절구(七言絶句)로 번역한 익재난고(益齋亂藁)’ 소악부(小樂府)는 고려가요(高麗歌謠)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 외에 익재집(益齋集)’, ‘역옹패설이 있다.

 

그가 만권당(萬卷堂)에 있었을 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하고 있다.
하루는 충선왕이 중국의 문인(文人)들과 더불어 시를 지었다.
닭울음소리는 흡사 문 앞 버들가지 같구나(계성흡사문전류(鷄聲恰似門前柳))”라는 한 구절을 충선왕이 읊자 중국 학사들이 그 출처를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충선왕이 얼른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곁에 있던 이제현(李齊賢)이 선뜻 응대하기를 우리나라(고려)의 시에 집 머리 동트는 날 닭울음소리 수양버들 휘늘어져 한들거리듯(미두초일금계창(尾頭初日金鷄唱) 흡사수양요요장)”이라는 글귀가 있는데 이는 닭울음소리가 가늘고 긴 것을 버들가지에 비유한 것이니, 전하께서도 이 뜻을 취하심이요, 또 한퇴지(韓退之)의 싯귀에도 뜬구름 버들가지처럼 뿌리도 꼭지도 없네(부운유서무근체)라는 말이 있으니 이는 곧 소리를 버들가지로 나타낸 것이 아니겠소하고 말하니 모든 사람들이 감탄했다고 한다.(동인시화(東人詩話))

 

1천여 년 뒤 한말(韓末)의 한문학 대가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은 익재(益齋)의 시를 <공묘청준(工妙淸俊)하고 만상(萬象)이 구비하여 조선 3천년의 제일 대가(大家)>라고까지 평가했다.

 

그가 일찍이 연경(燕京)에 있을 때 원()화가 진감여(陳鑑如)가 그의 초상화를 그리고 학자 탕병룡(湯炳龍)이 찬()을 썼는데 그 그림이 지금까지 전해져 국보로 지정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