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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집(白沙集) 내용 설명(9)

녹전 이이록 2010. 9. 20. 10:52

● 백사집(白沙集) 내용 설명(9)

 

 

○ 領議政漢陰李公墓誌(영의정한음이공묘지) (34)

 

李德馨(이덕형. 1561-1613)의 墓誌(묘지)이다.

 

1580년(선조13) 별시문과에 급제‚ 승문원에 보직되고 이어 정자·박사·이조좌랑·대사성 등을 지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지중추부사로 선조를 호송하였고‚ 청원사로 明나라에 건너가 원병파견을 요청‚ 명나라 장군 李如松(이여송)의 접반관이 되었던 사실 등을 소개하고 있다. 

 

○ 健元陵參奉李君墓誌銘(건원릉참봉이군묘지명) (45)

 

이항복의 종형인 安福(안복)의 아들 鳳男(봉남)의 墓誌銘(묘지명)이다.

 

집안 내력을 간단히 소개하고 나서‚ 그가 科擧(과거)를 보기 위한 학문을 싫어했고 효도와 공경을 극진히 하고 농사를 지으며 스스로 생활을 꾸려 나갔다고 적고 있다. 

 

○ 墓表-附陰記(묘표-부음기) (2)

 

이항복이 가깝게 지내던 인물들의 墓表(묘표)로 지어준 글들이 편집되어 있는 부분이다.

 

墓誌銘(묘지명)과 겹치는 내용이 많고 주로 살아생전의 업적과 관직생활 그리고 성품 등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먼저 <成均進士安君墓表(성균진사 안군 묘표)>(2)는 이름을 밝히지 않은 安君(안군)의 墓表(묘표)인데‚

어질고 착한 행실이 있어 상원군을 모실 적에 자제(子弟)의 과실이 없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어서 <司饔直長朴公墓表(사옹직장 박공 묘표)>(3)는 朴黎獻(박여헌)의 묘표이고‚ <贈吏曹判書張公墓表(증이조판서 장공 묘표)>(4)는 孝를 중심으로 소개한 묘표이고‚ <童蒙敎官李公墓表(동모교관 이공 묘표)>(6)는 李喜善(이희선)의 묘표이다.

 

그리고 李艮男(이간남)의 묘표인 <鳳山郡守李公墓表(봉산군수 이공 묘표)>(8)와 <鴻山縣監李公墓表(홍산현감 이공 묘표)>(9)가 이어진다.

 

<慶尙道都事丁公墓表(경상도도사 정공 묘표)>(10)는 丁煥(정환)의 墓表(묘표)인데‚ 성품이 장중하고 엄하고 강직하여 뜻을 보아서 사람을 사귀었고‚ 남의 非違(비위) 사실을 보았을 적에는 그와 좋은 사이일지라도 용서하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또 <副正李公墓表(부정 이공 묘표)>(11)는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어떤 일을 만났을 적에도 태연하게 순서에 따라 하여 반론을 세우지 않고도 직무를 수행하였다고 칭송하고 있다.

 

그리고 尹承勳(윤승훈. 1549-1611)의 묘표인 <領議政尹公墓表(영의정 윤공 묘표)>(13)와 崔汝雨(최여우)의 묘표인 <渭原君守崔公墓表(위원군수 최공 묘표)>(18)가 있다.

 

또 끝으로 가족친지들의 묘표인‚ <先府君墓表(선부군 묘표)>(20)와 <仲兄禁火司別提公墓表(중형승화사 별제공 묘표)-陰記(음기)>(21) 그리고 <叔兄繕工監監役公墓表(숙형 선공감 감역공 묘표)-陰記(음기)>(21)가 이어진다. 

 

○ 行狀(행장) (2)

 

지인들의 행장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대상은 거의 묘지명이나 묘표에 이미 기록된 인물들이다.

 

간단히 살펴보면 먼저 <領議政思庵朴公行狀(영의정 사암 박공 행장)>(2)은 이황을 師事(사사)하고 李珥(이이)를 탄핵했던 朴淳(박순. 1523-1589)의 행장이며‚ <都元帥權公行狀(도원수 권공 행장)>(8)은 권율의 행장이다. 

 

○ 遺事(유사) (21)

 

지인들의 遺事(유사)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대상은 거의 묘지명이나 묘표에 이미 기록된 인물들이다.

 

그리고 <淸江李公遺事(청강 이공 유사)>(21)와 柳成龍(유성룡)에 대해 적은 <西涯柳公遺事(서애 유공 유사)>(22)‚ 李舜臣(이순신)에 대해 적은 <統制使李公遺事(통제사 이공 유사>(25)가 이어진다.

 

주로 인품에 대한 칭송과 임진왜란시의 항전을 기리는 내용이다. 

 

○ 祭宋東萊-象賢-文(제송동래-상현-문) (33)

 

친구인 宋象賢(송상현. 1551-1592)에 대한 제문이다.

 

하늘이 그 편의를 봐주어 벼슬을 잃고 초야에 묻히더니 일찍부터 집 옮길 생각을 품어 강 북쪽에 자리잡고는‚

조석으로 스승의 자리에 앉아 후진을 계몽했다는 내용이다.  

 

○ 祭韓僉知-百謙-文(제한첨지-백겸-문)(34)

 

친구인 韓百謙(한백겸)에 대한 제문이다.

 

대체로 그가 평생 쌓아두고 발설치 못한 공이 아마도 죽어서는 시행함이 있으리니‚ 나의 의리는 漬綿(지면) 에 있거니와 글은 죽은 이를 높이지 못한다는 내용으로 안타까움을 전하고 있다. 

 

○ 祭郭正-之遠-文(제곽정-지원-문)(34)

 

郭之遠(곽지원)에 대한 제문이다.

 

일찍이 집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둘이서만 유독 친했는데‚ 이제 외로운 무덤 앞에서 서니 무척 그립다는 내용이다. 

 

○ 書牘(서독) (1)

 

<書牘(서독)>은 이항복이 지인들에게 보낸 10줄 이내의 짧은 편지글로서 詩(시)처럼 단아한 형식을 빌어 간절한 마음을 전한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먼저 <上楊天使(상 양천사)-邦亨(방형)‚ 十三>(3)과 <上沈遊府(상 심유뷰)-惟敬(유경)‚ 六>(10)은

楊邦亨(양방형)과 沈惟敬(심유경)이라는 중국사신의 노고와 격무를 칭찬하고 그의 편지에 답한 내용이고‚

<與兪相公(여유상공)-承宗‚(승종) 三>(13)은 兪承宗(유승종)에게 보낸 노구를 이끌고 고생하는 데 대한 문안편지이다.

 

그리고 <答尹海平(답 윤해평)-根壽(근수)>(15)는 尹根壽(윤근수)에게 抄史(초사)와 관련해서 보낸 편지이고‚  <與申敬叔(여 신경숙)-四>(15)는 화담서원과 관련해서 논한 글인데 拾遺(습유)라고 밝히고 있다.

 

또 <答李聖徵(답 이성징)-四>(17)는 1616년에서 쓴 것으로 이항복이 자신의 병이 깊어짐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고‚ <與張好古(여장호고)>(18)는 정충신에 대한 글이다.

 

그리고 <答朴子龍(답 박자룡)-二>(18)과 <答李剛中(답 이강중)-惟侃(유간)>(19)는 박자룡과 이유간의 편지에 대한 문안내용의 답장이다.

 

또 이어서 <與宋仁叟(여송인수)>(19)와 <答李監察( 답 이감찰)-琡(숙)‚ 三>(19)이 이어지는데‚ 喪禮(상례)에 대한 내용이다.

 

그리고 <與崔正字(여 최정자)-有海(유해)‚ 三>(21)은 사대부의 생산노동과 이득을 취하는 것이 옳은가의 여부를 두고 논의 한 내용이고‚ <答李佐郞(답 이좌랑)-明漢(명한)‚ 二>(25)는 몸에 병이 있음이 죄가 많아서인가 보다고 술회하는 내용이다.

 

또 신변의 이야기와 문안을 담은 답장인 <答朴錦陽(답 박금양)-瀰(미)>(25)‚ <答李正郞(답 이정랑)-景稷(경직)>(25)‚ <答崔喪人(답 최상인)-渷(연)>(26)‚ 그리고 1612년과 1613년으로 기록된 <答星男( 답 성남)-二>(27)와 <答井男( 답 정남)>(28)이 이어진다.

 

그리고 <答松雲師(답 송운사)-惟政(유정)>(29)은 사명대사에게 띄운 편지로‚ 어려운 상황에서 승군을 이끌고 있음을 칭송하는 내용이며‚ <與崔子謙(여 최자겸)-鳴吉(명길)>(29)은 주자의 道學(도학)과 ≪전습록≫ 등에 대한 의견을 술회한 것이고‚ <答李安邊(답 이안변)-時發(시발)>(29)은 곧 만날 수 있을 듯 싶다는 문안의 내용을 담고 있다. 

 

○ 朝天記聞(조천기문) (2)

 

1598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명나라의 각지를 돌면서 특정한 사실을 산문체계로 엮은 글이다.

 

먼저 鳳山(봉산)에 도착했을 때 姜德輝(강덕휘)라는 인물이 찾아와 그와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의 유민들이

중국으로 찾아든 경우가 많았다는 등의 이야기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산해관 외곽의 한 여관에서 머물고 있을 때는 조선인 30여명이 찾아와 탈출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했다고 전하고 있다.

 

또 연경에서는 조선의 사신들을 상대하던 한 책장수를 만나서는 글을 모른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는 나중에 중국에 사신으로 갈 사람들을 위한 몇 가지 경계를 기록하고 있다. 

 

○ 朝天日乘(조천일승) (9)

 

매일 매일을 일기 형식으로 운문과 산문을 병행하여 쓴 글이다.

 

운문은 주로 중국의 경치나 인물들을 보고 느낀 감회‚ 客愁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고‚ 산문은 만난 사람들과 겪었던 일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기록한 기간은 출발한 날짜인 1598년 10월 21일부터 시작해서 도착일인 이듬해 4월 24일까지가 해당된다.

 

첫째 날 기록에는 부사 李廷龜(이정구)와 서정관 黃汝一(황여일)과 함께 바다 길을 따라 龍川(용천)에 이르렀는데‚ 중간에 날씨가 추워 지체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11월 22일조에는 天妃(천비)의 묘를 지날 때 이정구가 마차에서 떨어져 황여일과 둘이서 먼저 묘를 참배했는데‚ 묘를 지키는 승려가 6명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정월 27일에는 入朝(입조)하던 상황과 주위의 모습에 대해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또 마침내 돌아오던 날의 기록에는 강을 건너는데 접반관과 지인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으며 우리들은 서로 마주보고 기뻐했다고 적고 있다.  

 

○ 年譜(년보) (2)

 

문인이었던 朴瀰(박미. 1592-1645)가 찬한 이항복의 연보이다.

 

이항복이 태어났던 1556년부터 죽음에 이른 1618년까지를 연대순으로 나열하여 그의 행적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 家狀(가상) (2)

 

이항복의 가계를 중심으로 소개하는 내용이다.

 

籍(적)이 경상도 경주부로 되어 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증조부에서부터 가계를 소개하고 이항복의 어린 시절과 관직생활‚ 임진왜란 때의 행적과 친분관계 등을 기록하고 있다. 

 

○ 行狀(행장) (2)

 

여기에는 張維(장유)가 찬한 이항복의 行狀(2)과 申欽(신흠. 1566-1628)이 찬한 神道碑(신도비)(16)‚ 그리고 李廷龜(이정구)가 찬한 墓地銘(묘지명)(31)과 墓表(묘표)(45)가 수록되어 있다.

 

이항복의 가계와 인물됨 그리고 관직생활을 들어 그를 칭송하는 내용으로 첫 부분에서 살펴본 이항복의 인물소개와 대동소이하다.  

 

○ 賜祭文(사제문) (2)

 

여기서는 이항복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제문을 모은 부분이다.

 

먼저 張維(장유)의 <致祭文(치제문)>(2)이 있고‚ 이어서 이항복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화산서원에 보낸 趙復陽(조복양)1609-1671)의 <抱川花山書院賜額致祭文(포천 화산서원 사액 치제문)>(2)‚ 그리고 역시 덕산서원에 보낸 金昌協(김창협. 1651-1708)의 <北靑老德書院賜額致祭文(북청 노덕서원 사액 치제문)>(3)‚

임금이 작성하고 승지가 전한 <御製盡像致祭文(어제진상치제문)>(4)이 보인다.  

 

○ 祭文(제문) (5)

 

이항복을 기리는 수십 편의 제문을 모아 편집한 것이다.

 

작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 挽詞(만사) (2)

 

이항복에 대한 여러 사람들의 만사를 모은 부분이다.

 

평소의 친분관계를 소개하고 죽은 이를 아까워하고 그 인품을 칭송하는 내용이다.

 

沈喜壽(심희수. 1548-1622)‚ 柳根(유근. 1549-1627)‚ 李好閔(이호문. 1553-1634)‚

李廷龜(이전구. 1564-1635)‚ 尹昉(윤방. 1563-1640)‚ 韓浚謙(한준겸. 1557-1627)‚

金昌一(김창일. 1548-1631) 등 많은 사람들이 지은 만사이다.

 

그리고 崔錫鼎(최석연. 1646-1715)이 지은 이항복의 영전을 그린 것을 보고 지은 <白沙先生盡像贊(백사선생 진상찬)>(15)과 1635(인조 13)년에 창건된 화산서원의 상량문으로 '金瑬(김류)가 지은 <花山書院上樑文(화산서원 상량문)>(16)‚ 그리고 북청에 노덕서원을 세우면서 崔錫鼎(최석연)이 지은 <老德書院重建上樑文(노덕서원 중건 상량문)>(17)이 있다. 

 

○ 諸公撰述(제공찬술) (3)

 

이항복의 죽음을 추모하며 지인들이 지은 글을 묶은 것이다.

 

먼저 金尙憲(김상헌. 1570-1652)의 <楊山野人談錄(양산 야인 담록)>(3)과 金尙容(김상용. 1561-1637)의 <記夢說(기몽설)>(4)이 있고 宋時烈(송시열)의 <跋(발)>(5)‚ <丁巳記聞錄(정사기문록)>(6)‚ <跋(발)>(9)‚ <白沙先生手蹟帖跋(백사선생 수적첩발)>(10) 등 네 편의 글이 실려 있다.

 

그리고 尹拯(윤승)의 <丁巳獻議石刻跋(정사헌의 석각 발)>(10)‚ 송시열의 <文忠公鐵嶺歌跋(문충공 철령가 발)>(11)‚ 崔有海(최유해. 1587-1641)의 <老德書院留書敍(노덕서원 유서서)>(12)이 이어진다.  

 

○ 諸公記識(제공기식) (13)

 

여기서는 여러 인물들의 저술 가운데 포함된 이항복과 관련된 내용들이 소개되어 있다.

 

주로 이항복에 대한 인물평과 친분관계를 나타내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구체적으로 거론된 문헌들은 다음과 같다.

 

<牛溪先生日錄(우게선생 일록)>(13)‚ <象村集求正錄(상촌집 구정록)>(14)‚ <象村晴窓軟談(상촌 청창연담)>(14)‚  <月事集(월사집)>(15)‚  <寄齋壬辰日錄(기재 임진일록)>(17)‚ <芝峯類說(지봉유설)>(19)‚

<竹窓間話(죽창간화)>(19)‚ <石異聞錄(석이문록)>(20)‚ <荷潭破寂錄(하담파적록)>(21)‚ <柳夢寅野談(유몽인 야담)>(22)‚ <許氏識小錄(허씨 식소록)>(22)‚ <樂全集(낙전집)>(23)‚ <南溪集(남계집)>(23)‚ <東平尉聞見錄(동평위 문견록)>(24)‚ <趙忠靖家傳舊聞(조충정가전 구문)>(24) 

 

○ 擬辨尹善道誣疏(의변윤선도무소) (2)

 

이항복의 증손인 宗城(종성)이 쓴 글이다.

 

尹善道(윤선도. 1587-1671)가 이항복이 쓴 <己丑記事(기축기사)>‚ <鄭慄挽詩(권융만시)>와 관련해서 그를 誣告(무고)했던 일과 관련해서 이를 반박하고 이항복을 옹호하는 내용이다.

 

윤선도가 이항복의 글을 곡해하여 음해했다는 논지이다. (박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