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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판공(蘇判公) 이전의 실전상계에 대하여

녹전 이이록 2020. 1. 14. 09:12

소판공(蘇判公) 이전의 실전상계(失傳上系)에 대하여



(본 원문은 닉네임 라디오님이 쓴 글로 재령이씨 종보에 게재된 좋은 글입니다.

필자의 소견과 같기에 복사하여 올립니다.)


소판공(蘇判公) 이전의 실전상계는 합천이씨에서 간행된 족보인 1529년의 己丑譜(기축보). 1754년의 甲戌譜(갑술보). 1801년의 辛酉譜(신유보). 1876년의 丙子譜(병자보). 1907년에 간행된 丁未譜(정미보)까지 어느 족보에도 등재된 적이 없었으나 1932년의 壬申大譜(임신대보)에 경주이씨 시조 휘 알평 이하 세계 원류 원도(始祖諱謁平以下世系原流圓圖)에 처음으로 게재되어 있다.


그 후 1968년의 합천이씨 족보에 ‘35대 실전세계를 경주이씨 익재공파보와 평창이씨 족보에 의거하여 실었다고 하였으며, 경주이씨 족보에 실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50년 전 陜川李氏家譜(합천이씨 가보)에서 발견된 실전상계는 진천에 살던 慶州后 李學榮(경주후 이학영)씨가 을유 7월에 奏文使(주문사)로 북경에 가다가 노변에서 동종인(同宗人)을 만나 족보를 확인하여 5일간 머물면서 祖先(조선)失傳系(실전계)를 찾아 唐紙板刻(당지판각)으로 된 譜牒(보첩) 一卷(1)을 받들고 本國(본국)에 돌아왔다.


그 후 弘文館都承旨(홍문관 승지)全州后 李仁明(전주후 이인명)()하여 進啓(진계)하니 ()允許(윤허)하였기를...


그러나 1904년에 경산군수 이계필(李啓弼)공이 경주이씨 파보에 서술(敍述)한 내용은 "후손 계필이 임인(1902) 여름에 고을 군수로 왔는데 일가 사람 모모가 옛날 간행한 것을 받들고 와서........ 후일 고증하기를 바란다." 고 하였다.


필자가 이에 그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신라시대의 기록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내용이 대부분이었으며 시조의 18(필자는 위작이라 생각하고 휘()자를 모두 생략함)에 족보와 문집을 간행하였다는 것은 우리나라 족보의 역사에 부합되지 않는 내용이다.


안동 권씨 성화보나 문화 유씨 가정보를 살펴보아도 선조의 휘자와 관직명만 기록된 것이 조선초기까지의 간행된 족보의 양상인데 자(), (), 시호(諡號) 및 행적이 상세히 기록된 것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150년 전의 합천이씨 가보는 찾아 볼 수 없는 족보이며 연대별로 고찰하여도 그 출처가 분명하지 않고 특히 李學榮(이학영)과 도승지 李仁明(이인명)이란 분의 기록은 왕조실록과 사마방목 등에서 조차 고증하기가 어려웠으며 도승지는 홍문관의 관원이 아니다.(승정원에는 있다)


그런데 위작(僞作)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시조 알평공의 손자(시조 3세 타) 기록에서 다음과 같이 발견되었다.


표암공의 손자 기록에 호를 표공(瓢公) 선생이라 하였고 마한에 사신으로 간 내용 중 마한왕이

"대국을 섬기는 예절이 이와 같은가"라고 꾸짖으니 선생은 말하기를

"우리나라에 두 분의 성인이 출현하면서, 사회가 안정되고 천시(天時)가 조화를 이루어, 창고가 가득 차고, 백성들은 공경과 겸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진한의 유민들로부터 변한, 낙랑, 왜인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두려워하고 심복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임금이 겸손하여 저를 보내 귀국을 예방하게 하였으니, 이는 오히려 지나친 예절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한 내용은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혁거세왕 38년 봄 2월에 호공(瓠公)을 보내 마한을 예방한 내용의 일부와 너무나 정확하게 일치한 부분이다.


그리고 저자 김부식은 호공에 대하여

"瓠公者 未詳其族姓 本倭人 初以瓠繫腰 渡海而來 故稱瓠公(호공자 미상기족성 본왜인 초이호계요 도해이래 고칭호공)" 이라 부언했으니

"호공이란 사람은 그 집안과 성씨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본래는 왜인이었는데 처음 박()을 허리에 차고 바다를 건너온 까닭에 호공이라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공은 삼국사기에 계속 언급되는 인물이며 탈해왕 때 재상(宰相)급인 대보(大輔)에 임명되고 삼국유사에서는 탈해가 호공의 집을 빼앗은 이야기가 있으며 또 탈해왕 때 호공이 숲 속에서 황금 궤를 발견하여 탈해왕이 가서 궤을 열어 보도록 하였더니 궤 속에서 나온 아이가 후에 김씨의 시조 알지(閼知)라는 기록이 전한다.

이와 같이 신라초기의 호공(瓠公)을 표공(瓢公)으로 둔갑시켜 표암공의 손자 기록으로 위작한 내용이 거의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또 표공의 따님이 남해왕의 비() 운제부인(雲梯夫人)이라고 했으나 이것 또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조차 명확하지 않지만 박씨의 족보 등 여러 문헌에 왕비는 김씨로 되어 있다.


* 즉 몇 가지 잘못된 내용을 지적하여 이 '실전세계'는 바르지 못한 사실적인 세계가 아님을 말한 것입니다.


*어떤 종친님은 다른 집안에서는 없는 것도 만들어 집안을 자랑하는데 있는 것을 왜 버리느냐는 말도 하는데

없는 것을 만들어 조상님을 자랑하는 것은 도리어 조상님을 욕뵈는 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