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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이씨(慶州李氏)에 대(對)하여 - 5

녹전 이이록 2018. 7. 28. 09:59

경주 이씨(慶州李氏)에 대()하여 - 5



경주이씨에 대하여 쓴 좋은 글이 올라 있어 이를 소개합니다.


글 내용에서 잘못 쓴 내용이 있어 이를 원문에 [*...................]로 수정하여 올립니다.

 

한편 경주이씨 [*분파도(分派圖) 분적도(分籍圖)]에는 전술한 [*10본의 분적종 8본의 분적종] 중 [*성주이씨와 우계이씨는 합천이씨(陜川李氏). 차성이씨(車城李氏). 우계이씨(羽溪李氏) 3개 성씨는] 거명(중시조)의 윗대에서 분파되었으며 [*나머지는 나머지 재령이씨(載寧李氏). 아산이씨(牙山李氏). 원주이씨(原州李氏). 진주이씨(晉州李氏). 장수이씨(長水李氏) 5개 성씨는] 거명(중시조)의 아랫대에서 분파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경주이씨는 고려 말에 크게 세력을 떨쳤고 조선에 들어와서도 문과 급제자 178, 상신 8, 대제학 3명을 비롯하여 10여 명의 공신과 많은 학자, 명신을 배출하였다.


[* 8대파 중 14대파 중] 상서공파의 백사(白沙 : 李恒福)이 가장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고, 익재공파의 [*세칭 8() 화곡(華谷 : 李慶億)][*() 대장을 낳은 국당공파 국당공파의 매죽헌(梅竹軒 : 李浣)]이 그에 버금간다.


경주이씨가 조선에 배출한 상신· 문형 가운데 백사 집에서 영의정 4, 좌의정 2, 대제학 2명이 나왔고,

[*8별집 화곡집]에서 좌의정과 대제학 각 1, 국당공파 중의 정순공(靖順公 : 誠中) 후손에서 좌의정

1명이 나와 이들 3파가 사실상 경주이씨의 주축을 이루었다.


인물


고려 말의 대학자이자 외교가, 문장가, 충신이기도 했던 익재(益齊) 이제현(李齊賢. 1287 ~ 1367)이 고려 때의 경주이씨를 대표한다.


이제현은 [*충선왕부터 공민왕까지 다섯 임금을 섬기며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일곱 임금을 섬기며] 여러 방면에 공적을 남겼고 문장가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외교가였다.


조선시대에는 8형제가 모두 문장에 뛰어나 8문장으로 꼽히는 박팽년의 사위인 이공린(李公麟)의 아들들(팔별집)과 임진왜란이 터지자 유성룡을 도와 병참 책임을 맡는 등 큰 활약을 한 이시발(李時發)을 비롯하여, 오성과 한음의 일화로 유명한 오성대감 이항복은 임진왜란 때 5차례나 병조판서를 역임하여 국난을 수습, 전후 정승에 올라 당쟁 을 막는데 힘쓴 조선시대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청백리에 올랐다.


백사공(白沙公) 이항복(李恒福) 대하여


1556(명종 11)~1618(광해군 10)


이항복(李恒福. 명종 11(서기 1556)~광해 10(서기 1618)은 서울 출신으로 조선 선조 때의 대신이다.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청화진인(靑華眞人동강(東岡백사(白沙)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었다.


공의 아버지 몽량(夢亮)3조 판서를 지냈고 당대의 명경(名卿)으로 칭송되던 인물이었다.


어려서는 악동(惡童)으로 골목대장이었으나 어머니의 꾸중을 듣고 학문에 열중하더니 뒤에 학궁(學宮)에 들어가 더욱 정진하여 이름을 떨치니 당시의 재상 권철(權轍)이 듣고 만나보고서 손녀사위를 삼았다.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은 이때에 만나 평생의 지기(知己)가 되었다.


선조 13(서기 1580) 문과에 급제한 다음 호당(湖堂)을 거쳐 옥당(玉堂)에 들어가서 선조의 신임을 받았다.


호조참의에 이르렀을 때에 왕명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공평하게 다스려서 평난공신(平難功臣)이 되었다.


당시 사화(士禍)가 일어나 대신 정철(鄭澈)이 수괴(首魁)로 몰리어 찾아가는 이가 없었으나 공은 거리낌 없이 방문했으며 승지 때에 정철의 죄를 태만하게 처리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승지의 신분으로 임금을 모시고 천신만고 끝에 임진강을 건너 개성(開城)에 이르렀으며 이때에 이조참판이 되고 오성군(鰲城君)에 봉해졌다.


두 왕자를 호위하여 평양(平壤)에 이르러 호조판서에 특진되었다.


이때에 조정(朝廷) 대신들의 공론은 임금이 함흥(咸興)으로 피란해야한다는 쪽으로 기울었으나 공은 함흥은 명나라와 교통할 수 없으므로 영변(寧邊)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하여 초저녁에서 새벽까지 임금의 장전을 한음과 교대로 찾아가서 간청한 끝에 새벽녘에야 윤허(允許)를 받았다.


그러자 함흥으로 가자고 주장하던 대신들이 부모의 병이나 자신의 노구(老軀)를 이유로 호종(扈從)하기를 꺼리므로 공이 분연히 나서서 임금의 수레를 붙들고 진두지휘를 하였다.


평양에서 다시 의주로 가서 명나라에 원병(援兵)을 청하고 명나라의 대병(大兵)을 조선에 이르게 하였다.


임진정유의 전쟁 중에 병조판서를 5번이나 맡으면서 침략자를 소탕하였고 전쟁이 끝난 뒤 선조 31(서기 1598)에 우의정이 되었고 부원군을 받고 정응태(丁應泰)가 명나라에 무고(誣告)한 사건을 바로잡기 위하여 진주사(陳奏使)가 되어 부사(副使) 이정구(李廷龜)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특유의 해박한 문장으로 해명하니 명나라 황제가 오해를 풀고 정응태를 파면하였다.


이어서 영의정에 오르고 호성일등공신(扈聖一等功臣)에 책록되었다.


때에 정인홍(鄭仁弘) 등이 성혼(成渾)을 무고하므로 그의 무죄를 변호하다가 정철(鄭澈)의 당()”이라는 혐의를 받으니 자진하여 영의정을 그만두었는데, 선조가 허락하지 않고 거듭 불렀으나 성만(盛滿- 벼슬과 명예가 가득함)’이 되었으니 물러나는 것이 군자의 도리라 하였다.


선조는 거듭 부르고 공은 응하지 않으니 조정이 이 일로 어수선하여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때에 한 벼슬아치가 평안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데, 싫다는 사람을 왜 그렇게 자꾸 부르시는지 모르겠다.”는 불평이 선조의 귀에 들어갔다.


선조가 진노하여 대신(大臣)을 능멸하는 자를 어떻게 처벌하는지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찾아보라고 나무라시고 그 자는 그 길로 청풍군수로 내쳤다.


이 뒤에도 공은 끝내 복직하지 않았으나 예우는 예전과 같이 했고 큰 일이 있을 때에는 공의 자문을 받았다.


광해군(光海君)이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해하려 하므로 변호하다가 정인홍 등의 탄핵을 받았고 폐모논의(廢母論議)가 일자 극력 반대하다가 북청(北靑)에 귀양 가서 거기에서 죽었다.


후에 관작이 환급되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포천(抱川)에 예장했고 북청과 포천의 선비들이 각각 사당을 세워 모셨으며 효종 때에 사액(賜額)되었다.


공은 천성이 효우돈목(孝友敦睦)하고 기생을 가까이 하지 않았으며 관직에 있는 40여년 동안 당쟁(黨爭)에서 초연하였다.


저서는 백사집(白沙集)2·북천일록(北遷日錄)2·주소계의(奏疏啓議)2·사례훈몽(四禮訓蒙)1·노사영언(魯史零言)15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