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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에 기록된 경주이씨 인물(이존오) - 20

녹전 이이록 2018. 7. 10. 09:31

고려사절요. 동문선 등 문헌에 기록된 경주이씨 인물(이존오) - 20



고려사절요. 동문선 등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조상님들의 행적을 공과를 떠나서 기록된 내용  그대로 올립니다.


해당 조상님 외에 기록 내용 중에 경주이씨 조상님의 휘(諱- 돌아가신 분의 이름)가 있으면 큰 글자체로 나타내고 약술합니다.


이존오(李存吾) - 2


처음에 존오가 소(상소)를 초하여 문하성에 나가서 소매 속에서 초고를 꺼내어 보이니, 여러 낭관들이 연명하기를 어렵게 여겼다.


존오는 정추와 인친(姻親)이 되므로, 정추에게 말하기를,


형은 마땅히 이와 같지 않을 것이오." 하니, 정추가 그 말을 따르므로 드디어 함께 소를 올렸다.


춘부 등이 정추에게 묻기를,


너를 꾀어 소를 올린 자가 누구냐." 하니, 답하기를,


우리 부자가 서로 이어 간대부(諫大夫)가 되어 나라의 은혜를 받았다.


이제 왕께서 정사를 위임하는 데 사람을 잘못 써서 사직을 위태롭게 하니 사람마다 분개하는 것을 보고, 언관의 직책에 있으면서 잠자코 있을 수 없다.


어찌 남이 꾀기를 기다려서 말하겠느냐. 더구나 신돈이 권력을 제 마음대로 부리니 길가는 사람들까지 두려워하여 눈짓으로 말하는데, 누가 시킬 것인가." 하였다.


존오에게 묻기를,


너는 아직 입에서 젖내가 나는 동자인데 어찌 능히 스스로 알겠느냐.


반드시 몰래 사주한 늙은 여우가 있을 것이니, 숨기지 말고 말하라." 하니, 답하기를,


국가에서 동자가 아는 것이 없다고 여기지 않고 언관에 두었으니, 감히 말을 하지 않아서 국가를 저버리겠느냐." 하였다.


이때 존오의 나이 25세였다.


신돈의 당이 이것을 기회로 자기들과 의견을 달리한 자를 다 제거하고자 하여, 명망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정추 등과 공모한 사람으로 끌어넣으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정추 등에게 말하기를,


만약 전 정당 원송수(元松壽)와 전 시중 경천흥(慶千興)이 사주했다고 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답하기를,


몸이 간관이 되어 국적(國賊)을 논핵하였을 뿐이니, 어찌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은 일이 있겠는가.


또 죽고 사는 것은 명이니, 어찌 남을 무함하여 화를 면하기를 구하겠느냐." 하였다.


우헌납 박진록(朴晋祿), 우사의(右司議) 임현(林顯)이 정추 등을 순군옥에 가서 보고, 진록이 장차 나오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사람 구실을 못하니 사람이 아니다." 하니, 임현이 몹시 놀라며 빨리 나오면서 말하기를,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였다.


마침내 정추를 폄출하여 동래 현령(東萊縣令)으로 삼고 존오를 폄출하여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삼았다.


정추 등이 옥에 갇혔을 적에 신돈의 당이 꼭 죽이고자 하니, 이색(李穡)이 춘부(春富)에게 말하기를,


두 사람이 미치고 망령되었으니 진실로 죄를 줄 만하다.


그러나 태조 이후로 5백 년 동안에 한 사람의 간관도 죽이지 않았는데, 이제 영공(令公 신돈)의 일로 인하여 간관을 죽인다면 나쁜 평판이 멀리 전파될 것이다.


더구나 소유(小儒)의 말이 대인(大人)에게 무엇이 손상되겠는가. 영공에게 아뢰어 그들을 죽이지 않느니만 못하다고 하라." 하였다.


춘부 등이 그렇게 여겨 정추 등이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존오는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고 학문에 힘썼으며, 강개하여 뜻과 절개가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울분이 쌓여 병이 되었다.


그 후 6년 만에 병이 위독하여 좌우 사람에게 부축하여 일으키게 하고 말하기를,


신돈의 세력이 아직도 치성한가." 하니 좌우 사람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도로 누우며 말하기를,


신돈이 죽어야만 내가 비로소 죽을 것이다." 하더니, 자리에 도로 누워 편안히 눕히기도 전에 죽었다.


존오가 죽은 지 4개월 만에 신돈이 죽임을 당하였다.


왕이 그 충성을 생각하여 성균 대사성을 증직하였다.


아들 ()는 나이 10세였는데 왕이 손수, '간신(諫臣- 충어허는 신하)) 존오의 아들 안국(安國)'이라 써서 정방(政房)에 내려 장거직장(掌車直長)을 제수하였다.


안국(安國)(’)의 어릴 때의 이름이다.


이존오(李存吾)


호는 석탄(石灘). 1341(충혜왕 복위 2)~1371(공민왕 20)


석탄공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학문에 힘써 10여세에 12()에서 공부하고 20세에 문과에 급제, 사한(史翰)으로 있을 때 정몽주(鄭夢周정도전(鄭道傳이숭인(李崇仁) 등과 학문을 토론했으며 정언에 이르렀을 때에 신돈(辛旽)이 집권하여 횡포를 일삼는데 누구도 감히 나서서 신돈의 방자와 음탕을 나무라지 못하였다.


때에 공이 분연히 나서서 왕에게 글을 올려 신돈을 쳐죽여야 한다고 탄핵의 글을 올렸다가 도리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매우 위급했었는데 이색(李穡) 등의 힘으로 극형을 면하고 장사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고 후에 석탄(石灘)에서 은둔생활을 하다가 울분으로 죽었다.


뒤에 왕이 공의 충성을 깨닫고 성균관 대사성을 추증했다.


* 계대는 중시조 19세 문하시랑공(휘 춘림)에서 계대를 달리하여 중시조 18세 사재감승공(휘 길상)을 아버지로 한 석탄공은 차자로 경주 이씨 14개 대파 중 석탄공파 파시조이다.


이래(李來)


1362(공민왕 12)~1416(태종 16).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초명은 내(), 자는 낙보(樂甫). 존오(存吾)의 아들이다.


아버지의 충성스런 위업으로 10세의 어린 나이로 전객녹사(典客綠事)에 특임되고 1383(우왕 9)에 문과에 급제, 우사의대부에 올랐다.


1392(공민왕 4)에 정몽주의 일당으로 몰려 계림(鷄林)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렸고 1399(정종 1)에 좌간의대부, 이듬해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추충좌명공신(推忠佐命功臣) 2등에 책록 되었고 계림군(鷄林君)에 책봉되었다.


1402(태종 2)에 대사간을 거쳐 공조판서에 오르고 1404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이 되었으며 이듬해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이 되었고 1407년에 죄빈객, 이듬해에 지의정부사 겸 판경승부사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경절(景節)이다.


태종 묘정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