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교는 혼백과 귀신이 없다?
- 이이록 (2010-03-29 )
위의 글에서 아래와 같은 문장이 있어서 성균관 홈페이지에 문의하여 받은 답변입니다.
[유교에서 조상은 귀신(phantom)이나 혼령(ghost)의 형태로 살아 계신 것이 아니라 기억(memory)의 형태로 남아 있다.
유교의 사유(思惟)속에는 원칙적으로는 유령이나 조상의 영혼이 없다고 한다.]
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사에 흔히 혼백과 귀신을 말하고 있는데 위의 글 내용과는 사뭇 다른데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지요?
(답변)
△ 명륜골선비 (2010-03-29 12:01:41)
우선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을 몇 가지 들어보겠습니다.
자로가 귀신 섬기는 것에 관하여 묻자 공자께서는 산사람 섬기는 것을 잘 못하면서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는가? 라고 대답하셨고 이어서 죽음에 대해 묻자 삶도 알지 못하면서 어찌 죽음을 이야기 하겠는가?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해석이 분분할 수 있습니다만 주자대로 해석하면 삶과 죽음, 살아있는 자와 귀신은 하나이지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공자께서는 자불어괴력난신(子不語怪力亂神 : 공자께서는 괴이한 것, 힘쓰는 것, 어지러운 것,
귀신에 관한 것은 그다지 말씀하지 않으셨다.)이라 하였습니다.
또한 공자께서는 ‘그 귀신이 아닌데 제사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다. ’ 라고도 하셨으며, 공자의 집 근처에서 푸닥거리를 할 때 조복을 차려입고 사당의 섬돌에 올라가 푸닥거리 하는 쪽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그 이유는 조상신께서 놀랄까봐 걱정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유가의 귀신관은 논어에 나오는 경이원지입니다.
즉 공경은 하되 멀리 하는 것입니다.
다만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 - 아래를 배워 위에 달한다.’라 하여 삶에 대한 충분한 고민과 학식이 없이 형이상(形而上)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것을 몹시 경계하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여하튼 유가의 제사는 그 귀신에게 올리는 것입니다.
기타 유가 경전에도 귀와 신, 혼과 백에 관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나오며, 성리학의 완성자인 주자의 저서인 ‘주자어류’의 3번째 장 또한 귀신장입니다.
번역본도 있으니 주자어류의 귀신장을 보시면 유가에 대한 귀신론을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 草庵 (2010-03-29 12:20:54) X
아래와 같이 대강 살펴보건대 儒家(유가)의 법도로는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혼과 백이 분리됨을 의미합니다.
까닭에 儒家(유가)에서는 魂神(혼신)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儒者(유자)라면 魂神(혼신)은 부정하는 글을 쓸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부정한다면 先祖(선조)의 祭祀(제사)를 지내지 말아야 할 것이고 선조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면 儒者(유자)가 아닙니다.
●雜記註謂旣葬也棺柩已去鬼神
●郊特牲尸神象也註尸所以象所祭者故曰神象
●問喪祭之宗廟以鬼享之徼幸復反也
●朱子曰人死雖是魂魄各自飛散
●鄭氏曰骨肉歸于土魂氣則無所不之孝子爲其彷徨三祭以安之
●退溪曰死者神魂飄忽無依
●頤庵曰靈魂乍依神主不能安定而遽以火焚祝或致驚散故姑不焚而懷之
●明齋曰題主後卽返魂(㪅)無辭墓之文恐是急於反虞未遑於他節也
*첨언 - 위의 ( )자는 丙 밑 攴자로 更과 동자임.
● 묘제상(墓祭床)에 돼지 머리도 가능합니까?
일반적으로 제사에는 돼지고기를 사용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데 사이트 게시판 사진에 돼지머리가 올라져 있어 문의 드립니다.
남해사람들이 제사에 돼지고기를 사용한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답변) M
일반적으로 돼지나 소의 머리는 한 마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운반과 금전 등 여러 이유로 머리를 쓰는 것입니다.
파조나 불천위 대제에는 돼지나 소를 익히지 않고 내장만 제거 후 날 것을 통으로 쓰는 게 일반적인 경우입니다.
그러나 익히지 않으면 이 또한 당일 시제 참석자들이 음복이 불가함으로 현대에는 익혀서도 사용합니다.
●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의 뜻
1) 顯(현)
나타나 주십시오. 이 자리에 와 주십시오. (appear)
비록 육신은 죽어 없지만 정령과 마음은 이곳에 나타나 함께 해 주십시오. 라는 뜻이다.
2) 考(고). 妣(비)
考는 아버지, 妣(女+比)는 어머니,
祖考(조고)는 할아버지, 조비(祖妣-女+比)는 할머니,
曾祖考(증조고)는 증조할아버지, 증조비(曾祖妣)는 증조할머니,
高祖考(고조고)는 고조할아버지, 고조고비(高祖考妣)는 고조할머니를 뜻한다.
예부터 4대 봉상만 하도록 하는 것이 예법이다.
만약 모든 조상들을 후손들이 일일이 챙긴다면 후손들은 조상으로 인하여 아무런 일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서 고조할아버지 윗대 이상은 집에서 제향을 지내지 않는 것이 관습이다.
결국 유교에서 조상은 귀신(phantom)이나 혼령(ghost)의 형태로 살아 계신 것이 아니라, 기억(memory)의 형태로 남아 있다.
유교의 사유(思惟- 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속에는 원칙적으로는 유령이나 조상의 영혼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부 유학자들은 혼백이니 귀신이니 하고 말하기도 한다.
3) 學生(학생)은 죽은 조상이 살아 계셨을 때의 직책이다.
학생이란 그야말로 벼슬은 하지 않고 평생 배움으로 일관한 분이란 뜻이다.
관직이 있으면 관직명을 쓰는 것이 더 명예로운 일이나 관직이 없으면 學生이라는 말로 대신한다.
죽은 學生의 부인을 "孺人(유인)“이이라 호칭한다.
孺人은 조선시대 품계표를 보면 어엿한 종9품(從九品)의 벼슬이다.
4) 府君(부군)은 ‘집안의 어른’이란 뜻이다.
죽은 ‘아버지’나 ‘남자 조상’의 높임말이다.
죽어서나마 君(군)으로 호칭하여 지위를 높여 준다.
5) 神位(신위)는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의지할 자리를 뜻한다.
신주나 지방을 모신 곳이다.
몇 글자의 글씨나 밤나무로 만든 신주에 조상을 상상할 수 있고 조상을 느낄 수 있다.
● 신주(神主)와 지방(紙榜)
○ 신주(神主)
제사상 위에는 조상의 신체로 여기는 신주나 지방을 모신다.
신주는 지체가 높은 명문가에서나 볼 수 있고 일반 가정에서는 지방을 사용한다.
신주의 높이는 약 20센티미터 정도이며 닭소리나 개소리가 들리지 않는 깊은 산 속의 밤나무로 만든다.
나무는 옹이(나무의 몸에 박힌 가지의 그루터기)가 없고 결이 좋은 것으로 써야 한다.
신주의 윗부분은 둥글고 아래는 모가 졌다.
신주의 모양, 명칭, 의미들은 아래와 같다.
신주(神主)의 둥근 윗부분을 원수(圓首)라 하니 이것은 천(天)을 상징한다.
신주는 높이가 1척 2촌이니 이것은 12개월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주의 너비는 3촌이니 이것은 월(月)의 일수(日數)를 상징하는 것이라 하며 신주의 두께는 1촌 2푼인 바 이것은 일(日)의 시수(時數)를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신주목(神主木)을 바치는 대(臺)를 부(趺)라 한다.
부는 높이가 1촌 2푼의 정사각형인데 1변의 길이가 4촌이고 이것은 세(歲)의 4시(時)를 상징하는 것이라 한다.
신주는 주독(主독)으로 싸 둔다.
주독이란 독좌(독座-위패를 넣는 함)와 독개(독蓋-위패를 덮는 함 뚜껑)로 이루어졌으며 이들은 흑칠한 것이다.
독좌(독座)는 사각이 다리의 모양을 한 주위에 앞면이 없는 3편을 둘러싼 것이고 그 안에 신주를 놓게 되어 있는 것이다.
독개란 4면과 위를 막고 아래가 없는 상자로 독좌를 덮게 되어 있다.
신주는 죽은 사람의 위패(位牌)이다.
대개 단단한 밤나무로 만들고 길이는 8치, 나비는 2치 가량이며 위는 둥글고 아래는 모지게 되어 있다.
치장(治葬) 때에 만들었다가 하관하여 매장한 뒤 제주(題主)를 하여 모신다.
신주는 주신(主身)과 받침대의 2부분으로 구성되는데, 주신은 앞쪽(前身)과 뒤쪽(後身)으로 나뉘고 이것들을 함께 받침대에 끼우게 되어 있다.
신주는 비단으로 만든 덮개(韜도) 및 깔개(藉자)와 함께 독좌에 모시고 독개를 덮은 뒤 창독에 넣어 사당의 감실(龕室)에 보관한다.
≒ 목주(木主). 사판(祠版).
△ 신주와 관련된 속담
* '가난한 집 신주(神主) 굶듯 한다.'
- 굶기를 예사로 한다는 말.
가난한 집에서 산 사람 먹을 것도 없는 처지라 죽은 사람을 위한 음식은 아예 생각할 수도 없는 상황을 의미한다.
* '치장 차리다가 신주(神主) 개 물려 보낸다.' . ‘사당 치례하다가 신주 개 물려 보낸다.’
-겉만 꾸미려고 애쓰다가 정작 요긴한 것은 잃어버리고 만다는 뜻.
무슨 일을 잘하려고 늑장을 부리다가 뜻밖의 낭패를 본다는 뜻.
*노름에 미치면 신주도 팔아먹는다.
-노름에 재미를 붙인 사람은 염치도 없고 예절도 모르고 조상님까지 팔아먹는다는 뜻.
○ 지방(紙榜)
옛날에는 신주(神主)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냈지만 지금은 거의 없고 대부분 지방(紙榜)으로 신주를 대용하고 있다.
신주(神主)는 원래 사당에 있어 그곳에 봉안(奉安)하였다가 기일(忌日)에 집으로 모셔다 놓고 제사를 지냈는데 지금은 사당이 없으므로 신주를 조성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서 그때그때 기일을 당하면 깨끗한 백지(창호지)에 붓글씨로 써서 정결한 벽이나 병풍에 붙이고 제사를 올린다.
지방을 작성할 때는 목욕재계하고 의관을 정제하여 끓어 앉아서 작성해야 한다.
지방은 합사인 경우는 남좌여우(男左女右- 앞에서 보아)로 쓴다.
지방의 크기는 길이 7치, 폭 2치 정도로 한다.
이 때 지방에 쓰인 고(考)는 사후의 부(父)를 일컬으며, 비(妣)는 사후의 모(母)를 일컬은 것이다.
또 고인이 살아생전에 벼슬을 하였으면 학생(學生) 대신에 관작(官爵)을 쓴다.
벼슬이 정1품 숭록대부(崇祿大夫)이라면 그 관직명을 쓰고 그 부인은 유인(孺人)을 대신하여 정경부인(貞敬夫人)으로 쓴다.
다만 18세 미만에 죽은 자는 수재(秀才) 또는 수사(秀士)라 쓰기도 한다.
모관(某官)에는 관직을, 모씨(某氏)에는 본관과 성을 쓴다.
●도적(都炙)
제사상의 꽃이라 할 만큼 주요 제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도적(都炙)이다.
고례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유교이념의 강화에 따라 가문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해서 성대하게 차릴 필요성이 있는 제물이었다.
예서에는 편적(片炙)이라고 해서 계적, 육적, 어적을 올리도록 되어 있는데 도적을 쌓을 때에도 우모린((羽毛鱗- 하늘을 나는 깃털을 가진 새라는 의미)의 원칙이 적용되어 가장 하단에 바다 생선, 중단에 육지의 짐승, 가장 상단에 하늘의 새를 배치했다.
이는 하늘, 땅, 바다로 구성된 우주적 질서를 묘사한다.
도적을 높이 쌓아 웅장함을 과시하기위해서 가장 하단에는 북어포 등과 같이 힘을 잘 버틸 수 있는 건어물을 깔아둔다.
이는 여타지역에서는 잘 볼 수없는 안동지방의 특색이다.
아울러 고임의 형태를 잘 유지하기위해 육류나 생선을 도막내어 나무꼬지에 꿰는 관적도 사용한다.
나무꼬지가 버팀목 구실을 하기 때문에 높이 쌓을 수 있다.
도적은 생육(生肉)을 쓰는 것이 원칙인데 이는 고례에 근거한 습속이다.
「예기」에 “지극히 공경하는 제사는 맛으로 지내는 것이 아니고 기와 냄새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에 피와 생육을 올린다.”고 했다.
이러한 지침에 입각하여 종묘, 향교, 서원의 제사에서는 날고기를 사용하고 안동향교의 경우 공자에게는 소머리와 돼지머리, 나머지 성현들은 얇게 저민 소고기와 돼지머리를 올린다.
도산서원에서는 퇴계 이황에게는 돼지머리를, 월천 조목에게는 돼지고기 덩어리를 올린다.
현재 안동의 종가에서는 생육(生肉- 생고기)과 숙육(熟肉- 익힌 고기)의 사용비율이 대략 절반 정도인데,
처음에는 생육을 올리다가 후대에 숙육으로 바뀐 경우가 많다.
오늘날 숙육의 사용이 증가한 것은 음복습관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예전에는 나물비빔밥으로 음복을 차리고 이튿날 제관이나 제사에 참여하지 못한 집안 어른과 이웃 어른에게 음복을 돌렸는데 최근에는 음복을 돌릴 곳도 마땅찮고, 차린 음식을 건네도 먹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가져가기를 마다하기 때문에 당일의 음복상에 모두 차려내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 되었고 점차 숙육으로 바뀌게 되었을 것이다.
○도적은 고기를 쌓는 것으로 메 앞의 서쪽에 놓으며, 편은 갱 앞의 동쪽에 놓는다.
이러한 음식들 중 도적은 바다와 땅과 하늘에서 나는 제물로 어적(생선)· 육적(육고기)· 계적(닭. 새고기)을 맨 아래부터 쌓는데, 특이한 것은 모두 날 것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는 「예기」의 혈식군자血食君子, 즉 ‘군자는 날것을 먹는다.’는 설에 근거한다.
○장을 볼 때, 유사들은 제수품의 값을 절대 깎지 않는다.
제사 비용은 경작하는 땅인 위토(位土- 제향에 관련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마련한 토지)와 땅의 관리를 위해 조상의 묘소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소(所- 장소. 묘소 주위의 땅)에서 마련된다.
● 분경(奔競)과 철행(綴行)
고려를 망하게 만든 망조(亡兆) 중 하나가 분경(奔競)과 철행(綴行)이다.
분경(奔競)은 분추경리(奔趨競利)의 줄임말로 관리들이 인사를 관장하는 고위관리나 정권 실세들을 분주하게 쫓아다니며 벼슬을 따내려 했던 일종의 엽관(獵官)운동이다.
철행(綴行)은 과거에 급제한 자가 하인들을 이끌고서 공공연하게 고위관리나 정권 실세들에게 문안인사를 올리던 행차다.
그 말뜻에서 보듯 인맥을 꿰러 다닌다는 것이다.
이런 나라가 안 망했다면 그게 비정상이다.
그러다 보니 새나라 조선에서는 분경이 금지됐고 철행도 '유가(遊街)'로 바뀌었다.
어사화 머리에 꽂고 자기 동네에서 '마(馬)퍼레이드'를 벌이는 장면이 바로 유가다.
철행이 위세를 부리는 것이었다면 유가는 자축하는 정도였다.
분경금지와 함께 철행도 유가로 약화된 것이다.
그런데 이 유가도 문과에 급제했다고 해서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허참례(許參禮), 중일연(中日宴), 면신례(免新禮)로 이어지는 공포의 3중 신고식을 통과한 자만이 머리에 어사화 꽂고 '금의환향(錦衣還鄕)'해 '마퍼레이드'를 할 수 있었다.
과거에 급제한 자는 신래(新來)라고 불렸다.
이들은 일단 예문관 성균관 교서관 승문원 등에 배치돼 오늘날의 인턴 과정을 밟도록 돼 있었다.
이들 4곳 모두 문신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기관이었다.
그러나 배치가 되었다고 해서 자리를 배정받아 일을 할 수 없었다.
허참례(許參禮)는 허참(許參), 허참연(許參宴)으로도 불리었다.
신입 관리가 출사를 할 때 선임 관리에게 음식을 차려 대접하고 인사드리는 예식으로서는 면신례 이전에 허참례(許參禮)가 있었다.
이 관례는 서로 마주 대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의미로서 새로 부임하는 관리의 오만함을 방지하기 위한 관습이었다.
즉 참여를 허락하는 절차이다.
권지(權知- 임시관직. 관직을 어떤 기간 동안 임시로 맡을 때 그 관직 이름 앞에 이 이름을 붙였다.)로 불리던 인턴들은 배속된 부서의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고 돈을 마련해 선배들에게 잔치를 열어주어야 했다.
조선 성종 때의 문신 성현이 쓴 '용재총화'에 따르면 원래 허참례는 신래들의 기강을 확립하려는 좋은 뜻에서 시작됐으나 점차 변질됐다고 한다.
그에 따라 명칭도 신래침학(新來侵虐)으로 바뀌어 불릴 정도였다.
중일연(中日宴)은 조선시대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승문원(承文院)·성균관(成均館)·교서관(校書館)·예문관(藝文館) 등에 임용되었을 때 선배 관원에게 대접한 잔치로 처음에 하는 잔치인 ‘허참례(許參禮)’와 큰잔치인 ‘면신례(免新禮)’의 중간에 하는 잔치로 극진한 성찬에 많은 기생까지 동원하여 잔치를 벌였다.
면신례(免新禮)는 고려 말 우왕 때 권문세족의 아들들이 부모의 권세를 배경으로 관직을 얻는 일이 많아지자(→음서) 선임 관리들이 그들의 기를 꺾고 관리들의 질서를 잡고자 시작되었던 것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졌다.
허참례 이후 열흘쯤 지난 후에 본격적으로 면신례를 행하는데 이를 치르고서야 비로소 선배 관리와 동석(同席)할 수 있었다
이것을 오늘날 신고식의 유래로 보기도 한다.